똥을 묻으며

시/제3시집-춤바위 2008. 1. 28. 20:25
 

똥을 묻으며


똥을 덮는다.

낙엽을 긁어모아

내 삶의 부끄러움을 덮는다.


아무리 묻고 묻어도

지워지지 않는 냄새처럼

묻을수록 더욱 살아나는

지난 세월의 허물들


이순의 마을 가까이엔

담장을 낮추어야 한다.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한다.


무더기 큰 똥일수록

햇살 아래 드러내어

바삭바삭 말려주어야 한다.


posted by 청라

상대동

시/제3시집-춤바위 2008. 1. 23. 10:52
 

상대동



재개발  마을 상대동에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공회당 마당에서

참새들만 농성하고 있다.


서둘러 떠난

빈 집 화단에는

황매화, 수국 꽃나무

꽃망울들이 여물고 있다.


참새들은 알고 있지.

이 마을엔 봄이 오지 않는다는 걸


 

피멍 든 외침만 각혈처럼 떠올라

노을 진 하늘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posted by 청라

유리창을 닦으며

시/제3시집-춤바위 2007. 12. 22. 19:26
 

유리창을 닦으며


아파트 유리창을 닦는다.

골짜기마다 감추고 있는 보문산의 비밀이

가까이 다가온다.


산밑 낮으막한 등성이에서

불꽃을 피워 올려

산벚꽃 연분홍으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

온 산을 덮는 봄날의 환희와


비온 날 아침 떡시루를 찌듯

뭉게뭉게 일어나는 골안개로 온 몸을 가렸다가

한 줄기 햇살로 맨살 드러내어

진초록 함성 하늘 향해 이글거리는 여름날의 열정,


늦여름 초록의 밑둥에서 조금씩 배어나와

색색으로 물들였던 산의 간절한 이야기 떨어지고

나무 가지마다 침묵으로 앙상한

저 가을날의 고독


시루봉 이마 하얀 눈으로 덮이고

골짜기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옅어졌다가

어느새 수묵의 함초롬한 자세로 식어있는

겨울날의 허무


유리창을 닦는다.

집안 가득

보문산을 들여놓는다.



2007. 12, 23

 





posted by 청라

귀향

시/제3시집-춤바위 2007. 11. 13. 09:34
 

귀향


휘파람새 울음을 밟고

돌아가네.

저녁노을 깔린 고갯길 굽이돌아

골어스름 안개처럼 내리는 여울 건너

마실갔다 돌아오는 아이처럼 돌아가네.


집집마다 한 등씩 불이 켜지고,

땅거미 따라 내려오는

남가섭암 목탁소리.

산벚꽃 자지러진 향내를 묻히고

사바의 마을을 닦아주는 천수경 한 자락.


장다리골 너머

초승달은 떠오르네.

달빛아래 몸을 떨며 손 내미는

작아진 산들,


도회의 옷들은 한 겹씩 벗으려네

모든 것 다 벗고

빙어처럼 투명해 지려네.


실핏줄까지 드러나는

어릴 적 마음으로

고향의 품속으로 안겨들려네.


posted by 청라

파계(破戒)

시/제3시집-춤바위 2007. 11. 2. 07:36
 

파계(破戒)



암자(庵子)들은 도심(都心)으로 내려오고

부처님 말씀은 그냥 산에 남아있다.


목탁을 쳐봐야

자동차 소리에 가로막히고

불경(佛經)을 외워봐야

아무런 울림이 없다.


어제 밤 몰래 먹은 한 잔 술에 취해

아침 예불(禮佛)도 거른 저 스님아

얻은 것은 풍요(豊饒)를 얻었지만

잃은 것은 도(道)를 잃었구나.

posted by 청라

황혼 무렵

시/제3시집-춤바위 2007. 4. 19. 19:13

황혼 무렵

淸羅 嚴基昌
물총새의 눈동자가
돌의 적막(寂寞)을 깔고 앉아서
부리 끝에 한 점 핏빛 노을
노을 속에서 물고기의 비늘들이
더욱 빛나고 있다.

저마다의 의미로 피어난 꽃들,
숨을 죽이고
온 몸 털 세워 바라보는 저
바위의 응시(凝視).

물총새의 부리 끝에
반짝
물비늘이 일렁인다.

퍼덕이는 물고기의 몸부림 속으로
내려앉는 어둠,

그 어둠마저도 아름다운 황혼 무렵에…….

posted by 청라

빈집

시/제3시집-춤바위 2007. 4. 2. 09:00

빈집

淸羅 嚴基昌
지난 가을 사립문 닫힌 뒤에
다시는 열리지 않는
산 밑 기와집

겨우내
목말랐던
한 모금 햇살에
살구꽃만 저 혼자 자지러졌다.

노인 하나 산으로 가면
집 하나 비고
집 하나 빌 때마다
논밭이 묵고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골목마다
농성하듯 손들고 일어서는
무성한 풀들

저 넓은 논밭은 이제 누가 가꾸나.

posted by 청라

王竹으로 사소서

시/제3시집-춤바위 2007. 4. 1. 09:00

王竹으로 사소서 <訟詩>

淸羅 嚴基昌
당신 곁에 서 있으면
왕대나무 잎새에서 일어서는
청아한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 곁에 서 있으면
대쪽같이 곧아서 서슬 푸른
티 하나 없이 맑은 마음 한 자락이 보였습니다.

흔들리던 역사의
골짜기에서도
굳게 뿌리를 내리시고

죽순처럼, 제자들
대숲 청청한 목소리로 길러내셔서
삼천리 방방곡곡
竹香 그윽한 세상 만드셨습니다

온 세상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굽힘없이 걸어오신 그 길 위에
가을빛 노을
곱게 물들었습니다.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서는 당신에게
비오니

억만 세월 굽힘 없이 하늘 받쳐 들고
꺾어도 꺾이지 않는
王竹으로 사소서

전성국 교장선생님 정년퇴임을 축하하며
posted by 청라

큰 스승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23. 11:46

큰 스승 (송시)
(박교식 선생님 정년퇴임식에서)

淸羅 嚴基昌

당신은
산바람에 씻기고 씻긴
소나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

한평생 올곧게
교단을 지키며
제자들의 마음도
곱게곱게 가꿔준 사람

산나리 꽃같이 숨어 피어
드러나지 않게
빛을 세워서
세상을 시나브로 밝혀가면서

어느덧 걸어온 당신의 발걸음은
제자들을 위한 눈물로
사십년을 넘겼습니다

질기디 질긴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당신은 참으로 큰 스승입니다.

posted by 청라

풀의 나라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4. 22:45

풀의 나라

淸羅 嚴基昌
풀이 일어나서
메마른 땅을 푸르게 덮는다.

뿌리끼리 서로 손을 맞잡아
땅 속의 모든 자양분을
빨아올리고

덩굴의 촉수를 감아 올려
나무도
꽃도
목을 조른다.

풀만 남은 풀의 나라엔
하늘 향한 발돋움이 없다.

풀잎끼리 팔 벌려
옆으로만 힘을 겨루며
한 뼘 더 뻗으려는
아우성만 있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