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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3시집-춤바위에 해당되는 글 98건
글
취설吹雪
마을에서 벗어나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섬처럼 조그만 집 하나 있습니다. 비어있는 도화지처럼 온 세상은 눈 덮여 하얗고, 길 끊어진 이웃은 십리보다 멉니다. 눈보라가 파도처럼 넘실거립니다. 울타리가 지워지고, 사립문이 지워지고, 위태롭게 서 있던 작은 집도 붓질 한 번에 지워집니다. 온 세상이 지워진 도화지 위에 등대인가요, 장밋빛 불빛 비친 창문만 화안합니다.
세월이 머리위에 눈빛으로 앉은 할머니는 저녁 상 위에 모주 한 병을 올려놉니다. 참나무 울타리로 으르렁 으르렁 눈보라가 지나가는데, 상관없지요. 할머니, 할아버지 부딪치는 잔에는 흥이 익어 얼굴은 먹오디 빛입니다. 할아버지는 추억의 갈피 속에서 가장 정다운 콧노래 뽑아내어 흥얼거리고, 할머니의 몸은 조금씩 흔들립니다. 타지로 나간 자식들 목소리 기다리다 수화기 위엔 뿌옇게 먼지가 쌓였지만, 신명이 물오른 할아버지 눈가엔 섬처럼 외로운 외딴집 겨울밤도 할머니 하나 있어 향연饗宴입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길마다 가려주는 취설吹雪도 포근한 수막繡幕입니다.
2010. 1. 21
글
아파트 까치
늦은 아침
아이들 놀이터 벚나무 위에서
까치가 요란스레 울고 있다.
아파트 문은 모두 닫혀있고
유치원도 못 갈 어린애 혼자 듣다가
모래만 뿌리고 심심해서 돌아갔다.
맑은 아침 햇살 물고 와
자랑스럽게 울고 있는 까치야
우리 마을엔 네 울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 아무도 없다.
생활에 쫓기는 도회지 사람들에겐
반가운 사람이란 아예 없는데
반가운 손님 온다고 아무리 울어봐라.
한나절 소식 전하다 지쳐
비둘기들 사이에 섞여 모이나 주워 먹다
자동차 경적에 놀라 비명처럼 쫓겨가는
비둘기의 날개 너머로
너무도 눈시린 가을…….
2009. 10. 23
글
3m
당신들의 그 새벽엔
하나님도 조상들도 아무도 없었다.
새벽 산책길, 3m 간격
그것이 삶과 죽음의 거리였다.
길 건너 도솔산이
부르는 대로
아내는 웃으며 도로로 들어서고
하늘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15m를 날아
아스팔트 바닥에 산산이 부서졌다.
너무도 맑아 바라보기도 아깝던
한 송이 짓이겨진 코스모스 꽃이여
피 묻은 향기는 하늘하늘 날아
먼 길을 가고
남은 사람의 앞길에
가로놓인
저 막막한 사막
새벽 산책길, 3m 간격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였다.
2009. 10. 6
글
산이 되기 위해
관음봉
꼭대기에 올랐다.
사랑, 미움 구름으로 날린다.
산 아래 마을에서
재어보던 그만큼
하늘은 더 높아졌지만
산 위에 다섯 자 반쯤
키를 보탰으면
입 다물고 산이 되어야지.
이름표를 떼고
장송 옆에 서서
내 마음 아궁이에 초록 불을 지핀다.
2009. 9. 25
글
생가 터에서
안부가 궁금해서
안테나처럼
회초리 하나 쫑긋하게 내세운 밤나무
가지 끝에는
썩은 둥치의 부피만큼 머물렀던
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
밤 잎으로 피어
그늘 속에
아버님 기침 소리
재주 있는 자식들 대처로 학교 못 보내
밤 내 콜록거리던 아버님의 각혈
육이오사변 통에 약 한 첩 못 써보고
자식 둘 먼저 보낸
피멍 얼룽이는 어머님 눈물
한숨 얽어 베 짜는 소리
연실이만 보면
가슴 설레던
무지개 추억들은 다 지워지고
웃자란 콩 포기 아래 묻히다 남은
주춧돌에 걸터앉으면
한여름이 달궈놓은 알큰한 온기처럼
오늘을 씻어주는
그믐 빛 따스한 추억
2009. 8. 30
글
글
글
대청호
그 자리에 가면 언제나
네가 있어서 좋다.
초파일 무렵 긴 가뭄으로
사랑이 목마를 때
연초록 산, 하늘 보듬어 안고
누이나 어머니 같이 거기 있기만 해도 좋다.
내 삶의 옥타브가
너무도 길고 지루할 때
작은 물결 파랑을 일으켜
언제나 내 아픔을 닦는 노래여!
나는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삶의 상처를 달래주는
네 노래의 향기를 마신다.
대청호에 가면
시들했던 내 삶이 연꽃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묻고 떠난 사람들의
고향 이야기가
밤이면 별처럼 반짝이는 곳
젖을수록 뜨거워지는
네 마음의 저녁놀로
내일의 내 삶에 모닥불을 피운다.
글
동해 기행
서른한 해 만에 나는
아내를 새로 사귀었다.
긴 머리만 보아도
가슴 떨리던
봄날 풀빛 같던 사랑은 흐려지고
손잡고 긴 세월의 강을 건너는 동안
아내는 사라지고
엄마만 남아
가슴 속 모닥불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우리의 여행은
목적지가 따로 없었다.
감포 대왕암에서 처음 바다에 반해
한사코 바다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마을길 산길로만 차를 몰았다.
이름 모를 고개 마루에서 울렁거리는
바다를 보며
나는 문득 아내 얼굴의 작은 실금에서
동해의 물이랑을 보았다.
발맞추어 어깨동무로 걸어오면서
무심한 내 눈빛에 상처 받고
가라앉은
처녀 적 열정을 일으켜 세워주는
동해의 바람소리를 들었다.
바다의 젊음은
세월의 창날에도 찢기지 않는 것이냐?
포효하며 달려드는 파도의 근육마다
알알이 일어서는 원시의 힘줄
방파제가 있는 조그만 횟집에서
소주 한 잔에 타서 풍랑을 마시면
바다를 못 다 물들인 금빛 햇살이
세월을 거슬러
처녀 적 회오리바람으로 일어서서
서른한 해 만에 나는
아내를 새로 사귀었다.
2009.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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