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자습

 

야간 자습




투명한 유리창은

아이들의 상승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수많은 목소리에 눌려

작아질대로 작아진 아이들의 소망은

가끔은 무지개빛 호랑나비가 되지만


초록빛 자유로운 바람으로

날아오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철조망은 날개를 찢어 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은 멎어 있었다


영산홍꽃 꽃가지마다

불을 지핀 오월이

산 접동새 소리로 아이들을 데리러 왔지만


유리창에 부딪쳐

힘없이 비가 되었다


어둠을 태우는 형광등

환한 불빛이

우리 아이들에겐 오히려

진한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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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잎 클로버 깃발처럼 내 가슴에 펄럭이는 날은




Ⅰ. 네잎 클로버를 따서

가슴에 꽂았다.

하루 내내 초록의 문을 열어 맞아들인

그 환한 보름 같은

주문을 안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 다방 그 자리에서

오늘도 너를 기다려야지

조금은 술에 취한 듯

흔들리는 도시를 안고

굳게 옭힌 매듭을 한 올 한 올 풀면서

네 얼굴 뒤에 숨은

또 하나의 얼굴을 보리라.


Ⅱ. 빌딩 숲 그늘에 눌려 살아서

응달 어린 싹처럼 노랗게 지나온 나날

산보다 더 높이 둥그렇게 달을 띄우고

오늘만은 절대로

허리 굽히고 살지 않으리

키작은 사람은

키작은 사람끼리 어깨동무 하고

마른 수숫대 모여 겨울을 버텨 내듯이

칡덩굴로 한데 얽혀 뻗어 가리라.

네 잎 클로버잎

내 가슴에 깃발처럼 펄럭이는 날은.













posted by 청라

다듬이 소리

 

다듬이 소리




다듬이 소리 청량한 소리

하늘 끝에 하나 남은 별불을 끄고

어둠의 맨땅 위에

길게 누운 아이의 영혼은 들리는가

수목처럼 청청한 목소리로

무한의 바다에 돌을 던지는

엄마의 음성이 들리는가

결고운 細명주

한 올 한 올 다듬는 소리

입을 아이 없는 옷을 만드는

손끝에 바람 이는 마음을 아는가.


posted by 청라

온실

 

온실




아픈 마음으로

촛불을 끄지 말자


온실에 가면

가녀린 꽃잎들이 어깨동무로 팔 벌리고

굳게 겨울을 막아 서 있는 것을.


땅 밑으로 믿음의 수액을 교환하며

늘 훈훈한 마음을 지켜가는 것을


꽃들이 서로 정답게

가즈런한 햇살을 나누어 이고

풀무치 소리는 풀무치 소리대로

아무 그늘 밑에서나 반짝이게 하고…


입동 끝 회색 빛 하늘 아래

작은 새처럼 깃 부비며

혼자 떠는 사람아.


온실에 가면

눈부신 손들이 서로 도와 일으켜 세운

아침이 열리느니

아픈 마음으로

촛불을 끄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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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우송

 

낙우송




바라볼 때마다 늘

새로운 눈빛으로 말하는

나무


수만의 함성으로 솟아 올라

초록빛 순수의 꿈이

마침내 푸른 창공에 젖는다.


곧게만 땅을 딛고 선 마음

허허로워

산처럼 바다처럼 하늘처럼 크고


굳은 듯 보드라운 깃발마다

등불을 켜고

어두운 세상으로 빛을 뿌리고 있다.


새떼처럼 떠나간 사람들 돌아와

피곤한 날개 접으면

가장 먼저 가슴을 활짝 열어 놓는 나무




posted by 청라

경포대에서

 

경포대에서




유리잔 속에 가득 고인

파도 소리를 마시고

황혼이 뜨겁게 달아 오른

바다를 본다.


끝없이 도약하는 파도와

한 송이씩 피어나는

불꽃

은밀한 눈빛들이 서로 얽히고

눈가루처럼 날리는 어둠.


그대 마음은

바다 물빛이 되라.

나는 따스한 눈빛으로 투신하는

별이 되리니.


상기한 바다는 밤새도록

한 잎의 해당화를 피우기 위해

가파른 기슭을 오르내리고,


새벽이 오면 우리는

갈매기 두 마리로 날자








posted by 청라

三月

 

三月




고층 빌딩 위에 까맣게

애드벌룬 하나

젊음은 자꾸만 날아 오르려 하고

도시는 한사코

줄을 당기고 있다.


겨울이 갇혀 있던

손수건만한 나의 뜨락에

분홍빛 바람기로 피어난

진달래꽃 한 송이


아침에 씹은 풋나물들은

햇살같은 웃음으로 살아 올라서

만나는 사람마다 손잡아 흔들고 싶은

마음은 몽롱한 봄안개


실비 그치면

산꽃이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눈물이 많은 나무는

더욱 고운 새순을 피워 내리라.


영롱한 새 소리에 청람빛 하늘이 녹아

불꽃으로 타오르는 三月에

금광을 캐듯 눈 속에 묻혔던

사랑을 캐보자

소녀야!





posted by 청라

눈오는 밤에

 

눈오는 밤에




세상을 지우며

눈이 내린다.

우리들이 걸어 온

발자욱을 덮는다


어지러운 불빛들도 차분히 가라앉고

포장마차엔

어둠이 반쯤 찬 술잔이 하나

술잔 속에 잠겨 있는 얼굴이 하나


술맛처럼 타오르는 옛날을 마시며

창밖을 보면

그믐의 막막한 어둠바다로

한 조각씩 별이 부서져 내린다.


하얗게 덮힐수록 내가슴 속에

솔잎처럼 파랗게 살아나는

그리움을 묻으라고

눈이 내린다.









posted by 청라

10월 마지막 날


 

10월 마지막 날




바람부는 날 단풍잎은

높은 음성으로 떨어진다

어느새 지나가버린 인생의 여백이

꽃물로 물들어 추락하고 있다.

은적암 산문을 들어서면

아직도 가을이 남아 있다.

고개 숙이다 만 국화꽃 사이

열 여덟 가을에

산그림자 속으로 숨은 사람

마음속 빈 들판에

언제나 피어 있는 나의 신부여

속세의 옷고름 아직 풀지 않았다기에

갈바람 갈피에 끼어 찾아 왔더니

목탁 소리 사이에 숨어 보이지 않는 사람

부처님 말씀 뒤로 숨어

보이지 않는 사람

염불 가루 먼저 내리는 곳에

아픔의 잎새는 더 곱게 물드는가

청춘의 그림자 보러 왔다가

빈 산만 보고 가는 불혹의 내 발길에

겨울로 넘어가는 달력 한 장처럼

서걱이며 쌓이는 이 진한 허무여



-시작노트-

  나는 초등학교 시절 마을 누나를 좋아한 일이 있다. 중학교 다닐 때쯤 그 누나가 마을에서 사라져서 어른들께 사연을 물었더니 중이 되려고 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늘 보고싶고 그리운 마음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는데, 대학교 3학년 때인가 동학사에서 우연히 만났다.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이야기를 하다가 일행들이 기다려서 바로 헤어졌다. 이년 후인가 다시 동학사엘 들렸더니 그 누나 스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40이 좀 넘어 어느 암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더니 그 누님은 속에의 모든 일을 잊고, 정말로 속세의 번뇌를 초월한 스님이 되어있었다. 홀로 돌아오며 섭섭한 심경을 노래한 시다. 그 날이 바로 시월 30일 이었다.






posted by 청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따뜻한 마음이 내비치는

그대 눈빛의 양지쪽 풀밭에 누우면

바람 소리 맑은 고향의

해바라기꽃이 생각나고

해바라기꽃 대궁 따라 끝없이 맴도는

나는 언제까지나

꿈 많은 술래이고 싶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고추잠자리 좇다가

허 허 웃는 풀꽃으로 서 있으면

바람은

붉은 보자기 펼쳐 놓은 하늘 한 자락 찢어다가

체온이 먼저 식는

발끝 어디쯤 싸매 주고

단절의 끈 한켠에서

간절한 송신을 띄우고 있다.

아삼한 봄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몽롱한 그대의 언어

등불처럼만 바라보며

가끔은 내가 던진 웃음이

쓸쓸한 어둠이 되어 돌아와도

나는

어둠을 까서 빛을 만들고

그대의 새벽 꿈밭에 빛의 소리를 전해주는

부리 고운 까치로 살아가고 싶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