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 생일을 축하하며

아내의 향기는

청국장 맛이다.

하루의 눈금 위를 초침처럼

수없이 더듬으며

가문 날에도 흠뻑 젖어 있는

당신의 손은

나이보다 더 많은 주름살로 덮여 있다.

식구들 생일은 꼼꼼히 챙기며

자기의 생일은 잊어버리고

신 새벽 아이들 아침 준비로

미역국도 굶은 아내여

생활의 아픈 멍울 가슴으로 싸 안으며

얼굴엔 항시 햇살 같은 웃음으로 집안을 밝혀

바라보면 고향같이 편안한

당신 앞에 서면

나는 일곱 살 철부지가 되지만

오늘은

소중한 줄 몰라서 더욱 소중한

단풍이 곱게 물든 당신의 가을 가슴에

장미꽃 한 다발 안겨주리라.  

색색의 눈빛으로 말하는 꽃들의 눈짓에 담아

마음속에 묻어 둔 사랑의 촛불을 밝혀

내가 지워 준 생활의 짐을 벗기고

웃음 속에 내비치는 외로움의 그늘을 지워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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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 낚시질

 

대청호 낚시질

놓아두고 간 그리움들이

물이끼로 돋아올 때쯤


호심에

줄을 던지면

삭지 못한 아픔들이 입질 하네.


물비늘 반짝이는 옛집 마당에서는

친구들의 웃음소리 건져올리고


진달래꽃 낯붉히던

이웃집 누이의 속마음도 건져올리고….


짐을 싸들고 뒤돌아보며

돌아 나설 때

안타깝게 손 흔들던 느티나무 언저리


고향은 거기 가라앉아서

천 년 산 그림자로 굳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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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마곡사

      연

    화  교

  건 너 서 면

솔바람 풍경소리

     향내

   서    린

  잎 새 마 다

불경 소리 담겨 있고

      법

    계  를

  지키고 서서

침묵하는 오층석탑


깨어진 돌부처에

염화미소 어리인 땅


잠 못 드는 노승의

천수경에 달은 지고


불심은 태화천에 녹아

사바세계로 흐른다


posted by 청라

공주(公州)에서

 

공주(公州)에서

친구여!

막걸리 몇 잔에 취해 별을 줍던

금강 변 백사장엔 오늘도 별이 내리느니.


가을이 석양빛 꽃물로

곱게 물들인 산성공원 오솔길로는

영은암 종소리가 늦바람으로 달려가느니.


몸이 떠나 삼십 년

마음마저 멀어져

목소리 아득한 나의 친구여


다시 금강 변 모래밭에 서면

그리운 모습들 보일 듯하여

갈바람 갈피에 숨어 찾아왔더니


강물은 어제처럼 흘러가는데

정다운 얼굴들 보이지 않네.


知天命 지나보낸 우리 나이에

무슨 더 큰 욕심 있으랴.


추억이 곱게 접히는 밤에

다시  어깨동무하고 막걸리 집 찾아

흥청거리며 걷는 발길엔


스물 다섯에 놓아두고 간

우리 젊음이

프라타너스 잎사귀처럼 지천으로 밟히리.

posted by 청라

목숨

 

목숨

저 그늘 외로운 길

햇살 따라 가다 보면

수줍게 입을 벌린

진달래꽃 한 이파리

한겨울 딛고 일어선

여린 목숨 하나.


산 빛 아직 익지 않은

초 삼월 바람 속에

목청 돋워 봄 부르는

등대로 피었느냐

한 모금 물빛 향기로

세상 밝히는 목숨 하나.

posted by 청라

기다림

 

기다림

막차는

휭 하니

바람만 뿌리고 지나간다.


가슴속에서 무너지는

섬광 하나


건너 뜸 개 짖는 소리

몸을 떠는 늦저녘 달

posted by 청라

눈 내리는 마을

 

눈 내리는 마을

세상으로 나가는 문들은

닫혀 있었다.

흰 산도라지 꽃 몽롱한 산자락마다

마지막 푸른 목청이 덮이고,

강물은 더 깊은 울음으로 우는데

솔가지 부러지는 산울림 끝에 심지 하나 박고

촛불을 켠다.

살갗마다 일어서는 빛이랑, 외로움이

붉은 포도주 한 잔에 녹아나고,

산마을 밖 두고 온 그리움 눈 속에 묻으면서

참나무 울타리 잎새 떨며 우는 바람에

아우성치는 세간의 정들 먼지처럼 날리리라.

칭얼대며 유리창 두드리는

송이 눈에

어제 일들 깨끗이 털어버리고,

혼자 마시는 술잔 가득

아직도 남아 있는 얼굴 목구멍 속에 구겨 넣어도

잠깐 취기처럼 아득한 세사의 뿌리들이

덮어도 덮어도 지울 수 없는 댓잎으로

돋아나는데

아무도 넘어오지 않는 회재 고개 너머로

오늘 잠시 떼어놓은 이름표를 달고

내일은 또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posted by 청라

산나리꽃

 



산나리꽃


때로는

혼자일 때가

더 외롭지 않을 수도 있다.


닿을 수 없던 한 뼘만큼의 눈물

꽃술 속에 감춰두고


민들레 꽃씨처럼 그리움의

날개를 날려

한 송이 수줍은

산나리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바람이 밟고 가는 나뭇잎 소리에

가슴 설레며

사랑하는 마음

몰래 피었다가 몰래 떨어지는

산나리꽃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posted by 청라

솔처럼 사오시라

 


訟詩



솔처럼 사오시라




산처럼 커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러워

쉽게 노하지 않는 사람


한 시대를 밝히던 횃불을 끄고

四十年 넘게 걸어오신

빛나는 발자취 돌아보는 뒷모습에

은은한 난초향이 풍겨옵니다


님이여!

당신이 첫발을 딛으시던

민족의 새벽은 너무도 춥고 어두웠습니다.

황량한 역사의 들에

묘목을 심고

풍설 속에 지성으로 가꾸신 당신의 손이

삼천리 강산 곳곳마다

초록빛 광휘 찬란한 한낮을 빚으셨습니다.


잡을 수 없는 거리만큼

이제

물러나시는 당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는 당신,

솔처럼 늘 푸르게 사오시며


무사히 맺으시는 작은 福

꽃으로 피워

가시는 발걸음마다 큰 福으로 열리소서.


<權義石 校長先生님 停年 退任式에 붙여>

posted by 청라

학같이 살으소서

 


頌詩



학같이 살으소서




나무라 치면

하늘 향해 팔벌린

낙우송이라 할까.

둥치처럼 견고한

내면의 성 쌓으시고

초록빛 그늘 드리운

당신의 가슴은 늘 열려 있어서

목마른 새

날개 지친 새들이

따스한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몸짓의 껍질을 벗기고

열려진 가슴 사이로 속을 들여다 보면

안경 너머로 건너 오는 눈빛이

너무도 정다워서 고향 같은

당신은

민족의 새벽 등불 들고

빛을 세우던 사람.


한 올씩 나눠주던 당신의 빛으로

삼천리 방방곡곡 조금씩 밝혀지고

그 빛이 다시 빛을 일구어

우리는 이리도 환한

한낮을 맞았더니다.


당신이 가꾸시던 이 꽃밭은 거칠어

아직도 많은 손길이 필요하지만

풍설 온몸으로 막으며

사십년 넘어 외로이 걸어오신

외길

질기디 질긴 끈을 끊으오니


님이여!

학같이 살으소서

학같이 살으소서.


<金洛中 校長先生님 停年 退任에 붙여>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