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 송이의 기적

 

 

산수유 꽃이 피었습니다.

세상의 겨울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마을에

당신이 보내준 작은 온정처럼

저 연약한 꽃 한 송이

무엇을 만든 것일까요.

눈보라로 덮여있던 사람들의 가슴은

더 이상 춥지 않을 것입니다.

집집마다 꽁꽁 닫혀있던 문들도

서로를 향해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믐의 어둠인 듯 막막하던 뜨락에

편지에 담아 전한 당신의 미소처럼

산수유 꽃 한 송이

세상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2020. 2. 7

충청예술문화96(20203월호)

posted by 청라

칡꽃

칡꽃

 

 

사랑도 집착이라

칭칭 감고 올라가서

 

자줏빛 환희를

마디마다 매달았네.

 

갈등葛藤

꽃으로 삭여

풀어내는 저 함성

 

 

2020. 1. 30

posted by 청라

봄날

봄날

 

 

이쁜이는 열여덟 살

푹 익은 찰 토마토

 

타는 몸 붉다 붉다

터질 듯 꼭지 돌아

 

눈웃음 살짝 보내면

톡 하고 떨어지겠네.

 

 

2020. 1. 6

posted by 청라

설화雪花

설화雪花

 

 

옷 벗은 빈 산하山河엔 달빛이 창백한데

홀연 함성처럼 일어서는 북 소린가

새벽에 박수 치며 온 저 사나이 너털웃음

 

시들었던 팔과 다리 넘치는 빛의 향연饗宴

깨어진 아픔 위에 덧 피어난 무궁화여

청년아, 서릿발 같은 깃발 하나 세우거라.

 

 

2020. 1. 5

posted by 청라

은행나무에게

 

 

외로움을 선택했구나.

그래서 열매도 맺지 않았구나.

싹트면 제 알아서 자라는 것들

아예 씨조차 뿌리지 않았구나.

 

근심을 거부하면서

네 집 문전엔 웃음 한 송이 필 날 없겠지.

커피 잔을 들어도 마주 대는 사람 하나 없고

네가 꺼놓고 나간 거실의 불은

어둠인 채로 너를 맞을 것이다.

 

채우면서 살아가라.

어치 두 마리 네 어깨에 앉아

고개를 갸웃대고 있다.

네 삶의 겨울에 네게서 끊어진 자리

여백으로 그냥 남기려느냐.

 

소소하게 반짝이는 근심을

즐겁게 마시면서 살아가라.

외롭게 외롭게 사라지기보다는

세상에 네 왔다간 점 하나 찍어놓아라.

 

 

2019. 12. 30

대전문학87(2020년 봄호)

 

 

 

posted by 청라

아내의 푯말

아내의 푯말

 

 

아내가

가슴 속에

푯말 하나 세웠다기에

깊은 밤 꿈을 열고

마음 살짝 엿봤더니

정 헤픈

남자는 사절"

붉은 글씨로 써 있네.

 

 

2019. 12. 14

 

posted by 청라

12월의 장미

 

 

한 철의 사랑만으론

목이 탔는가.

너무 뜨거워 서러운

내 사랑이

바람의 채찍을 맞고 있다.

사람들은 눈보라 속에 핀

장미를

불장난이라 탓하지만

어쩌겠는가.

참고 참아도 활화산처럼

터져버리고 마는 마음인데

 

2019. 12. 3

대전문학90(2020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평화

평화

 

 

평화는

나만 착하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굶는 이웃에게 밥을 주고

내 힘을 깎아내 어깨를 맞춰주고

나 혼자만 칼을 버린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아!

모두 잃은 후 목선을 타고

이 나라 저 나라로 목숨을 구걸하러 다니려느냐.

평화는 내가 약해져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주 강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019. 11. 22

충청예술문화93(201912월호)

posted by 청라

도담삼봉

도담삼봉

 

 

신선의 마을이 바로 여기인가.

 

남한강 물새 울음에

세 개의 암봉巖峰

그림같이 떠있고

 

장군봉에 터 잡은

육각 정자엔

한가로운 구름 그림자 걸려있다.

 

흰 두루미 한 마리

물에 잠긴 전설 건져 물고

삼봉 선생을 태우러 가는고.

 

강안江岸에 빈 배 홀로 누워

기다림이

적막으로 멋스럽다.

 

바위에 앉아 넋 놓고

삼봉에 취해있다 보니

해는 어느새 서산에 기울었더라.

 

 

2019. 11. 5

문학사랑130(2019년 겨울호)

대전PEN문학38(20216월호)

 

posted by 청라

나이의 빛깔

 

 

나이는 마음이다.

 

스물이라 생각하면 가슴에서

풀잎의 휘파람 소리가 나다가도

일흔이라 생각하면

은행잎 노란 가을이 내려앉는다.

 

일흔이라도

스물처럼 살자.

언제나 봄의 빛깔로 살아가자.

 

 

2019. 10. 3

시문학581(201912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