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역에서

 

 

보문산 뻐꾸기 노래처럼

들리다

안 들리다 하는 게 사랑이다.

 

울지 마라.

웃으면서 손 흔들고

돌아서서 눈물 흘리는 게 진짜

충청도 사랑이다.

 

작년 가을에

울면서 떨어지던 잎들도

말간 웃음으로 새롭게 등을 켜지 않느냐.

 

돌아서지 마라

아주 돌아서지만 않는다면

다시 돌아와 부둥켜안는 곳이

대전역이다

 

 

 

2019. 10. 10

대전문학91(2021년 봄호)

 

posted by 청라

권력의 법칙

 

옥양목 하얗게 옷 지어 입어도

세월 흐르면 때가 묻지

조금씩 검어지다가

원래가 검었던 듯 번질거리지.

 

정의로 일어선 권력도

세월 흐르면 때가 묻지

조금씩 더러워지다가

원래의 불의보다 더 뻔뻔해지지.

 

네 얼굴 한 번

맑은 거울에 비춰보아라.

 

비바람 속에서

늘 하얀 옥양목 어디 있으랴

썩지 않는 권력이 어디 있으랴.

 

 

2019. 10. 9

posted by 청라

[다시 쓰는 금강] 금강 - 엄기창(1952~)


김완하(시인·한남대 교수)

김완하 시인·한남대 교수

 

 

강 윗마을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초록빛 섬에
물새는 늘 구구구
꿈꾸며 산다.
숨 쉬는 물살 그 가슴에
한 송이씩
봉숭아 꽃물 빛 불이 켜지면
미루나무 그늘을 덮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말갛게 씻겨
모래알로 가라앉고
혹은강둑 이름 모를 풀꽃으로 피는데
강심에 뿌리 내린 바위야
나도 이 비단결에
곱게 새겨지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


이 세상 마을은 모두 강 윗마을과 강 아랫마을로 나뉜다. 그래서 두 마을 사이 강은 흐른다. 강의 흐름은 윗마을과 아랫마을 이야기 잇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강이 흐르면 사람들 모여들어 더 큰 삶의 강을 펼친다. 그 강 위로 사랑을 나르는 구구구 물새들. 아, 아침 안개 걷히는 강둑 위로 이름 모를 풀꽃도 피어 우우우 노래한다. 강 속으로 힘차게 밀며 가는 물살 그 가슴에 봉숭아 꽃물 빛 등을 켠다.
사람들 삶은 강둑에 이름 모를 풀꽃으로 피어나 흐르는 물에 말갛게 씻긴다. 강은 시간을 쟁이며 흘러 고운 모래로 쌓인다. 누구라도 금강에 오면 비단결 순한 강 자락 위에 곱게 새겨지는 이름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금강에 살면 금강을 닮고, 금강 닮은 아이를 낳고. 금강의 미소를 닮아 점점 금강으로 이어져 하나의 금강이 된다. 하여 진정한 금강으로 살아가는 자 백성 아니던가. 그가 바로 시민 아닌가.

posted by 청라

계영배戒盈杯

수필/서정 수필 2019. 10. 7. 10:58

계영배戒盈杯

 

  등산길에 한 친구가 K선생님 소천 소식을 전했다. 약간 시끄럽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니 그렇게 건강하고 열정적이던 분이 왜 갑자기?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짐작하는 바는 있는 것 같았다. 노욕老慾이 그 분을 망쳤을 것이다. 교수로 정년퇴임을 했으면 조용히 쉬면서 못다 한 학문 연구나 하실 것이지, 다 늦게 웬 사립전문학교 총장을 한다고 그 고생을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송사訟事에 휘말려 갖은 고통을 겪었으니 강철 같은 그분의 정신력으로도 아마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나친 욕심은 몸을 망친다. 나는 문득 계영배戒盈杯의 교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계영배戒盈杯란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술 어느 한도 이상 따르면 술잔 옆에  구멍으로 술이 새도록 만든 잔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에 춘추오패春秋五覇하나인 제환공齊桓公군주의 올바른 처신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려고 늘 곁에 놓아두고 마음을 가지런히 했던 그릇(欹器)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 불리기도 했다. 순자荀子에서 보면, 후에 공자孔子가 제환공의 사당을 찾았을 때 그릇에 구멍이 뚫려 있음에도 적당할 땐 술이 새지 않다가 지나치게 채웠을 때 술이 새는 이 잔을 보고 제자들을 둘러보며, 총명하면서도 어리석음을 지키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도 겸양하며, 용맹을 떨치고도 검약하며, 부유하면서도 겸손함을 지켜야한다며 이 그릇의 의미를 가르쳤다고 한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는 온 세상을 생명력이 넘치게 한다. 말랐던 논과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고, 시들거리던 초목도 기운을 차려 보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푸르고 싱싱하게 한다. 그러나 이 비가 지나치게 내려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일면 오히려 이 땅에 커다란 재앙이 되는 것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젊은 시절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기운도 능력도 떨어질 때가 되면 지나친 욕심은 내려놓아야 한다. 술을 어느 한도 이상 채우면 술이 새도록 만든 잔처럼 욕심이 지나쳐 몸을 망칠 때쯤이면 스스로 정화시킬 수 있는 자기 처신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2019. 10. 7

 

 

 

posted by 청라

부처님 웃음

부처님 웃음

 

부처님 웃음 길으러

마곡사麻谷寺 다녀오는 길에

산 아래 찻집에서

한 바가지 떠 주었더니

웃음 탄 연잎 차 맛이

향내처럼 맑고 깊다.

 

덜어도 줄지 않는

저 무량無量한 자비慈悲의 빛

구름 낀 세상마다

꽃으로 피는 저 눈짓을

아내여, 혼자 보라고

대낮같이 밝혔겠는가.

 

향불 꺼진 법당에서도

을 건너 웃는 뜻은

사바 업장 쓸어내는

범종소리 울림이라

오가며 퍼준 그릇이

텅 비어서 가득 찼네.

 

 

2019. 10. 5

 

posted by 청라

산촌의 겨울

산촌의 겨울

 

아무도 오지 않아서

혼자 앉아 술 마시다가

 

박제剝製로 걸어놨던

한여름 매미소리

 

나물 안주삼아서

하염없이 듣는다.

 

방문을 열어봐야

온 세상이 눈 바다다.

 

빈 들판 말뚝 위의

저 막막한 외로움도

 

달콤한 식혜 맛처럼

복에 겨운 호사好事거니.

 

가끔은 그리운 사람

회재 고개 넘어올까

 

속절없는 기다림도

쌓인 눈만큼 아득한데

 

속세로 나가는 길이

꽁꽁 막혀 포근하다.

 

 

posted by 청라

어머니 마음

어머니 마음

 

어머니 오시던 날

보자기에 산을 싸 와

 

비었던 거실 벽에

산수화로 걸어 두어

 

지쳐서 눈물 날 때마다

바람소리로 다독이네.

 

 

2019. 10. 2

 

 

posted by 청라

풍악산豊岳山

풍악산豊岳山

 

털털하게

섞여서 산다.

정 많은

사내처럼

 

뾰족했던 젊음들을

익히고 다스려서

 

온 산이 눈부신 환희歡喜로 타오르고 있구나.

 

 

2019. 10. 1



posted by 청라

꽃씨

꽃씨

 

코스모스

까만 꽃씨에

숨소리가 숨어있다.

 

살며시 귀를 대면

솜털 보시시한

 

벽 깨자

삐약 하고 울

박동搏動소리가 숨어있다.

 

 

2019. 8. 28

posted by 청라

거꾸로 선 나무

거꾸로 선 나무

 

세상은 안개 세상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옳은 것 그른 것도 능선처럼 흐릿하다.

물 아래 물구나무로 입 다물고 섰는 나무.

 

거꾸로 바라보면 세상이 바로 설까

호수에 그림자로 뒤집어 다시 봐도

정의도 불의도 뒤섞여 얼룩덜룩 썩고 있다.

 

여명이 밝아 와도 배는 띄워 무엇 하랴.

부귀도 흘러가면 한 조각 꿈인 것을

차라리 물 깊은 곳에 집을 틀고 싶은 나무

 

 

2019. 9. 25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