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태우며

슬픔을 태우며

 

 

미루나무 그림자가 노을 한 자락 걸치고 있는

금강 변에 서면

품고 온 슬픔이 없는데도 가슴에서 피가 난다.

 

착한 것도 죄가 되는가!

 

백제의 산들은 왜 모두 모난 데 없이 둥글기만 해서

적군의 발길 하나 막지 못한 것이냐.

 

나라 없는 백성들은 질경이처럼 짓밟혀서

꺾여도 꺾여도 옆구리에서 꽃을 피운다.

 

역사의 속살을 가리려고

바람은

투명한 수면에다 주름을 잡아놓는가.

 

짠한 눈물 몇 종지 스스로 씻어내며

세월의 골짜기를 흐르는 금강

 

강변에 불을 피우고

남은 슬픔 몇 단 불 속에 던져 넣는다.

 

 

2016. 9. 28

문장2017년 봄호(40)

시문학20178월호

 

 

posted by 청라

내 마음

동시 2016. 9. 23. 21:53

내 마음



아빠가 꾸중을 하면

내 마음엔 삐쭉 삐쭉

가시가 돋네.


엄마가 칭찬해주면

내마음엔 팔랑팔랑

날개가 돋네.


posted by 청라

청춘에 고한다

책은

눈물을 지워주는 지우개

 

많이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posted by 청라

한 대접의 물

한 대접의 물

 

 

해오라기는 서두르지 않는다.

가뭄에 밀리다

반달만큼 남은 마지막 물웅덩이

목숨끼리 부딪쳐 깨어지는

여기에서는

생명은 생명이 아닌 것이냐!

나는 갑자기

입술이 갈라터진 아프리카 소녀가 생각났다.

한 대접의 물로는

한 생명도 살릴 수 없지만

네가 부어주고 또 내가 붓다 보면

연못이 다시 넘치지 않겠는가.

 

 

2016. 9. 16

posted by 청라

추석 무렵

추석 무렵

 

 

들녘마다 음표音標들이 풍년가로 익어있다

귀뚜리 울음에 흥이 절로 녹아나서

벼운 실바람에도 출렁이는 어깨춤

 

동산 위로 내민 달은 알이 통통 들어찼다.

아내는 냉큼 따서 차례 상에 놓자하나

온 세상 채워줄 빛을 나만 두고 즐기리.

 

 

2016. 9. 9

posted by 청라

뿌리에게

뿌리에게

 

 

꽃이 되지 못했다고

서러워 말아라.

이른 봄부터 대지의 기운을

빨아들여

싹을 틔우고 잎을 키워낸

네가 없었다면

어찌 한 송이의 꽃인들

피울 수 있었으랴.

 

꽃이 박수 받을 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묻혔다고

울지 말아라.

세상에 박수 받던 것들은

쉬이 떠나가고

장막 뒤에 숨어있던 너만 살아 반짝일 때

그림자이기에 오히려 빛나는

뿌리의 의미를 알 것이다.

 

 

2016. 8. 19

『한국 시원』2018년 여름호(9호)

 

posted by 청라

대못

대못

 

 

도라지꽃 핀 돌무덤은

긴 대못이었다.

웃음꽃 벙글 때마다

어머니 가슴을 찔러

피멍울 맺히게 하는

뽑지 못할 대못이었다.

육이오 사변 통에

돌무덤에 묻혀

밤이면 부엉이 울음으로 울던 형

부엉이 울음 달빛으로 깔리던 밤

부엉이 울음 따라 나도 갈까봐

가슴에 꼭 안고서 지새우던 어머니

기억의 창문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길고 긴 한평생을 대못에 꽂혀

환하게 웃던 모습 본 적이 없다.

 

2016. 8. 2

posted by 청라

석불石佛

석불石佛

 

 

눈에는

동자가 없다.

시름만 가득 들어찼다.

 

코도 귀도 떼어주고

초점焦點 없는 눈만 남아

 

세상의

온갖 번뇌를

안개처럼 둘렀다.

 

 

2016. 7. 30

posted by 청라

행복

행복

 

 

저녁때 집에 돌아오면

집안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아내의 싱싱한 웃음이 맞아주니

행복하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아내의 하루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만이지.

삼십 년도 더 뒤에 등단한 친구에게

수상 대상자에서 밀렸으면 어떤가.

반백년을 시를 썼어도

애송시 한 편 못 남기면 어떤가.

며칠 만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서

잘 있다는 전화가 오고

카카오톡에는 손자 손녀들의 예쁜 사진이 쌓여가고 있다.

받아쓰기 이십 점을 받아오면 어떤가.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시들지 않으면 그만이지.

우리들은 가끔 행복에 취해

평범한 행복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엊그제 낸 시집이 팔리지 않아도

행복하다.

산나리꽃처럼 주위를 밝히는

촛불로 살아가면 족한 일이지

불행을 깎아 시를 빚어서

심금을 울리는 시로 빛나고 싶지는 않다.

 

2015. 7. 25

posted by 청라

유골함 이야기

유골함 이야기

 

유골함에 유골이

담기기 전엔

한없이 자유로운 빈 그릇이었지.

맑은 하늘과 소통하며

뻐꾸기 울면 뻐꾸기 노래 채우고

바람이 불면

찰람찰람 바람을 채웠지.

외로움이 없으니

비워낼 일도 없었지.

무언가로 채워야 할

사랑을 알 나이쯤

낯선 사람의 인생을 태운

이름이 가득 들어차면서

이제는 마음대로 비울 수도 없는

하늘 향해 꼭꼭 봉해진 유골함이 되었지.

 

2016. 7. 18

시문학201610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