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그릇

시/제3시집-춤바위 2011. 1. 26. 21:23

 

버려진 그릇

-도천 선생 그릇 무덤에서

 


바늘 자국만한 흠 하나로도

나는 온전한 그릇으로 설 수 없었다. 


삼천 도의 불가마에서

온 몸이 익어가는 통증 속에서도

다향으로 목 축일

작은 꿈 하나 있어 정신을 놓지 않았다. 


가마를 나와 탯줄도 자르기 전에

눈 뜨고 응아 한 번 울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져 무덤에 버려졌다. 


찻물 한 모금 담아보지 못하고

그릇도 아니고 흙도 아닌

제 살 조각도 맞출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람들은 지나가며

안쓰런 눈으로 바라본다. 


지나가는 사람들 뒷모습에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흠들 


저 많은 흠을 두르고

어찌 사람이라고 살아가나? 


아, 하느님은

도공보다 너그럽다.


2011. 1.25


 


posted by 청라

<신년 축하 시>

 

염원의 파랑새를 날리기 위해서는 

                              엄 기 창 

 

제야(除夜)의 종소리로 새해를 빚습니다.

신묘년(辛卯年)년의 태양이

한반도의 어둠을 쓸어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의 겨울은 참으로 추웠습니다.

땅 밑에서 고동치는 봄의 온기(溫氣)를 불러내어

상처 입은 가슴들에

연둣빛 새살을 돋게 하소서.

 

포격(砲擊)으로 일그러진 연평도 산하와

황운(黃雲)이 짙게 피어오르는 국토의 골골마다

비둘기의 은빛 날개로 덮어 주시고

북녘 땅 이리들의 날 세운 발톱에

강인한 족쇄(足鎖)를 채워 주소서.

 

사람들은 모두 다

어깨동무로 걷는 법을 잊었습니다.

정치의 마을엔 상생(相生)의 도(道)가 사라지고

경제의 마을에선 공생(共生)의 원리도 무너졌습니다.

 

윤리(倫理)의 깃대는 부러지고, 깃발은 찢어져

신문의 칸칸마다 무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끼니를 걱정하던 60년대부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입니다.


온 세계의 하늘을 향해 다시

염원(念願)의 파랑새를 날리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계룡산이 주위의 산들과 어깨동무로 노래하고

금강물이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흐르듯

새해에는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2011년 1월 1일 아침

<금강일보> 신년 축하시  

 

 

 

 

posted by 청라

20년 후의 나

수필/교단일기 2010. 12. 28. 16:07

20년 후의 나

 

유리창 밖으로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는구나. 메마른 나뭇가지에 조금씩 설화가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설경에 대한 감탄보다 너희들의 움츠린 어깨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내가 선생이기 때문일까?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너희들 교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단다. 내 첫 시집에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야간자습’이란 제목으로 써서 수록한 것이 있는데 한 번 소개해 볼까.  

투명한 유리창은/ 아이들의 상승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수많은 목소리에 눌려 작아질 대로/ 작아진 아이들의 소망은/ 가끔은 무지개빛 호랑나비가 되지만// 초록빛 자유로운 바람으로/ 날아오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철조망은 날개를 찢어 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의/초침은 멎어 있었다.// 영산홍꽃 꽃가지마다/불을 지핀 오월이/ 산 접동새 소리로 아이들을 데리러 왔지만// 유리창에 부딪혀/ 힘없이 비가 되었다.// 어둠을 태우는 형광등/ 환한 불빛이/ 우리 아이들에겐 오히려/ 진한 어둠이었다.

                                                                       <야간자습> 전문

 

우리 예쁜 공주님들아!
또 한편 생각해보면 자신의 발전을 위해 악조건 속에서도 강인하게 싸워나가는 너희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단다. 여자는 연약한 게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은 버리고 남자들과 당당하게 실력으로 맞설 수 있도록 자신을 닦아나가는 것이 현대 여성의 덕목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육십 살쯤 되어가는 내 친구들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친구들을 보면, 일찍이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는 자기발전의 노력을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몇 번쯤 성공의 기회가 오는데, 미리 준비한 사람들만이 그러한 기회를 잡아 성공하여 존중받는 인생을 살아나갈 수가 있단다.

3년 전 대전고 67회 제자들의 20주년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몇 명의 제자들의 말을 듣고 감격한 적이 있단다. 그 애들의 졸업 전 마지막 시간에 ‘20년 후의 나’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제출하게 했는데, 그 글을 쓰면서 정말로 20년 후의 영광스런 자신의 모습을 위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고 했지. 그때 비로소 인생의 목표를 갖게 되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다 보니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였다고 감사의 말을 하더구나. 한 학생의 말이라면 인사 삼아 한 말이라고 하겠지만 많은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미래에 희망을 주는 교육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

너희들도 이 기회에 2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않겠니? 그리고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보려므나. 그러면 20년 후 먼 발치에서 나를 보았을 때 달려와 자랑하고 싶을 만큼 성공해 있을 게다. 내가 가장 보기 싫어하는 것은 청소년 시기에 아무런 의욕 없이 살아가는 학생들이란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학생들을 일일이 깨워 세워놓고 수업을 한 것이란다. 노력하다 지나쳐 실수하는 삶은 희망이 있지만, 아무 것도 시도해 보지 않는 삶은 희망이 없는 것이지. 나는 정말 선생이 되고 싶어 교단에 섰고, 학생들을 위해 고집을 피우다가 큰 고난도 겪어본 사람이다. 지금도 내 큰 소망은 너희들이 내년에 가고 싶은 대학의 학과에 합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고, 미래에 자신의 주위나마 밝힐 수 있는 등불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란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고, 여름에 가꾸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단다. 우리 예쁜 공주님들, 20년 후에 모두 자기가 추구하는 부문에서만은 권위자가 되자.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멈추지 말고, 고지를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자.

20년 후, 아름답게 피어 세상을 향해 향기를 뿌리고 있을 너희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워진다.

 

 

2010년 12월 세모

엄 기 창(국어, 대전둔산여자고등학교)

posted by 청라

뜸부기

시조 2010. 12. 14. 10:53

뜸부기

 

저녁노을

한 모금씩

물고 와서

뱉어내어

 

자운영꽃 속울음을

텃논 가득 뿌려놓고

 

온 봄내

끓는 피 데워

몸을 푸는 뜸부기

 

2010. 12. 14

 

 

 

posted by 청라

청하계곡에서

시조 2010. 11. 30. 15:49

청하계곡에서 

 

솔 사이로 새는 별을

소주잔에 동동 띄우고

 

보름달 곱게 깎아

떡갈잎에 한 조각 싸서

 

임 한 잔 마실 때마다

입에 넣어 주는 밤

 

 

산은 바람을 불러

가락을 연주하고

 

물은 하늘을 담아

별 세상을 꾸며주네.

 

임과만 둘 있는 세상

산과 물은 장식일세.

 

2010. 11. 30

 

 

 

posted by 청라

선물

 

선물 

 

고향 산 솔바람을 박씨처럼 물고 가서

 

작은 누님 무덤가에 총총히 심어놓네요.

 

첫 제사 선물 삼아서 솔향기도 담아가고.

 

 

여기 솔바람은 열무김치 맛이다 야

 

부모님 유택 뒤로 산 뻐꾸기 울던 시절

 

누님의 그 말소리가 저녁달로 뜨네요.

 

 

2010. 11. 16

posted by 청라

원가계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0. 11. 4. 08:10

원가계에서

 

신선도를 보고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더니

 

원가계에 와서 보니

그림이 산수를 다 그리지 못하였네.

 

폭포 소리 녹아

솔향 더욱 그윽한 곳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면

 

속진(俗塵)이 말갛게 씻겨

나도 신선이 되리.

 

posted by 청라

이달의 문제작 시

엄기창론 2010. 10. 22. 12:31

이달의 문제작 시>




향일암(向日庵)에서


절 마당은
무량(無量)의 바다로 이어지고

무어라고 지껄이는 갈매기 소리
알아들을 수가 없다.

바다를 지우며 달려온 눈보라가
기와지붕을 지우고
탑을 지우고

목탁(木鐸)소리마저 지운다.

지워져서 더욱 빛나는
관음상 입가의 미소처럼

나도 눈보라에 녹아서
돌로 나무로 바람으로 지워지면
갈매기 소리 알아듣는 귀가 열릴까.

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

<시문학> 2008년 10월호



엄기창 시인은 암자를 찾아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는다. 그런데 시인은 ‘향일암’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아니 절에서 바다를 읽는다. 바라봄의 인식 과정을 통해 ‘바다’와 ‘절’을 한 몸으로 동화시켜버린다. 지상과 바다가 하나로 연결되고, 바다 위를 비행하는 ‘갈매기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로 자신조차 무화된다. 이 무화 혹은 몰각의 상태는 ‘지움’의 과정을 통해 무념무상의 경지를 획득한다. 하여 종국에는 ‘목탁소리마저 하얗게 지워’진 상태에 도달한다. 조용히 지워지는 사물을 바라보며 화자는 평안한 서정에 젖는다. 아니 자신도 ‘녹고, 지워지기’를 소망한다. 꿈꾼다. 그 지워짐을 통해 ‘귀’가 열리길 기대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을 깨달음처럼 독백한다. “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고. 화자는 향일암의 기행을 통해 ‘지움’과 ‘비움’이라는 소거, 소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바다처럼 출렁이는 인간 세계의 욕망들을 지우고 비우고자 하는 화자의 희구가 맑고 추워서 서늘한 세한도처럼 깨끗하다.



양병호, ‘기억과 추억이라는 이름의 환상열차’
<시문학> 2008년 11월호
posted by 청라

은적암

시조 2010. 9. 28. 21:31

 

은적암



골 깊어 한낮부터

부엉이는 울어서


부엉이 울음 따라

송화 가루 날려서


담 없는 절 마당으로

산이 그냥 내려와서


여승은 염불하다

끝내는 걸 잊었는지


부처님은 웃다가

성내는 걸 잊었는지

저녁놀 익은 조각이

꽃비처럼 날린다.


posted by 청라

현충일 애상

시조 2010. 9. 14. 10:54

현충일 애상

 

 

묵념의

나팔소리

꿈결같은 현충일

 

물젖은

할아버지

눈동자에 도장 찍힌

 

아파트

한 동에 걸린

태극기

하나,
        둘…,
                    두 -
                           울…….

 

2010. 9. 14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