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날

시/제3시집-춤바위 2013. 11. 11. 08:51

어느 가을 날

 

회초리를 놓고서

국화꽃을 들고 간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하늘빛을 닮은 가을날에

 

교실 구석엔

아직도 오지 못한 한 아이의 자리

어둠에 묻혀 있고

 

일찍 들어선 겨울이

군데군데 눈처럼 쌓여

그림자를 만드는데

 

땡감 맛 논설문을 배울

교과서는 덮어놓자.

꽃물 번져가는 교정의 나무들 꿈꾸는  

무지개 빛깔 시 한 수 읊어보자.

 

국화 향 은은한

시로 닦아낼 수 있는 그늘이

아주 작더라도

 

한 발짝 먼저 나가지 않으면

어떠리.

아이들 마음이 풍선으로 떠올라서

하늘에 닿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

 

 

 

2013.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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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시/제3시집-춤바위 2013. 10. 23. 12:00

바다

 

바다가 어디

깊은 산골 맑은 물만 받아

저리 맑은가?

 

끊임없이 黃河를 가슴에 품고서도

씻고 또 씻어

 

바다는 금방 하늘을 닮는다.

 

2013. 10. 23

 

posted by 청라

미소 지킴이

시조 2013. 10. 20. 09:42

미소 지킴이

 

미소가 등불처럼 고여 있는 아내의 입가

수삼 년 꽃 못 피운 동백나무 심고 싶다

미소를 자양분 삼아 꽃잎 활짝 피어나게

 

어렵게 피어난 꽃 온 계절 지지 않게

작은 내 관심에도 햇살 같은 아내 얼굴

행복한 아내 얼굴에 미소지킴이 되고 싶다.

 

2013. 10. 20

 

2013년 <문학사랑> 겨울호

posted by 청라

序詩

시/제3시집-춤바위 2013. 10. 12. 22:30

序詩

 

황토 물에 떠내려가는

母國語

한 조리 일어

내 시를 빚었다.

 

거친 모래밭에 피어난

풀꽃 송이들아

 

반딧불로

불씨를 살려

사람들의 가슴마다

진한 香氣의 모닥불을 피워 주거라.

 

2013. 10. 12

posted by 청라

廢寺의 종

시조 2013. 10. 9. 08:59

의 종

 

-빛 단풍이 타오르는 골짜기에

기와지붕 허물어져 비새는 절 추녀 끝에

썩다 만 조롱박처럼 매달린 종 하나.

 

오랜 세월 울지 못해 울음으로 배부른 종

소쩍새 울음으로 달빛으로 키운 울음

종 벽 속 꿈틀거리는 용암 같은 피울음.

 

이순 넘은 삶의 망치 꽝 하고 두드리면

산사태 몰아치듯 사바까지 넘칠 울음

종 채를 들었다 놨다 가을 해가 기우네.

 

2013. 10. 9

 

 

posted by 청라

마곡사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9. 30. 07:43

마곡사에서

 

산문(山門)의 천왕님은

아직도 눈을 부라리고 있다.

 

묵언(黙言)의 입 꼬리에

몇 올

밧줄 같은 거미줄 걸고

 

내 다섯 살 여름 무렵 첫 대면에  

불타던 그 화산

아직도 눈빛에 이글거리고 있다.

 

옷을 털고 또 털어도

털어낼 수 없는

업연(業緣)의 질긴 먼지들,

 

쓸쓸히 돌아서서

태화산 그림자에 묻혀

세상도 부처님도 모두 잊으니

 

일체의 업장(業障) 쓸어내듯

마음 속 울려주는

늦여름 매미 소리…….

 

2013. 9. 30

posted by 청라

마곡사 범종소리

시조 2013. 9. 25. 10:51

마곡사 범종소리

 

마곡사 범종소리

법당 하나 짓고 있다.

 

여울물 물소리로

한 모금씩 묻어 와서

 

사랑이

메마른 마음마다

독경 소리 울리고 있다.

 

2013. 9. 25

 

posted by 청라

訟詩 -꽃으로 피소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9. 3. 15:44

訟詩

 

꽃으로 피소서

-이경주 교장선생님 청년을 축하하며

 

엄 기 창

 

산처럼 무거워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러워

쉽게 노하지 않는 사람

 

四十年 가까이 걸어오신 삶의 길에

인연의 줄을 접으며

빛나는 발자취 돌아보는 뒷모습에

은은한 솔향기가 풍겨옵니다

 

포연으로 일그러진 전쟁 통에 태어나

황량한 고국의 뜰을 일구어

묘목을 심고 정성스레 가꾸기에

당신의 손길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나무들은 건강히 자라

무성한 숲을 이루고

당신이 가꾸신 이 조국은

세계 속에 우뚝 솟은 거목이 되었습니다.

 

긴 항해 끝에 닻을 내리고

이제는 돌아서야 할 시간

멈추어서 더욱 빛나는 당신을 향해 비오니

새로운 걸음걸음 꽃으로 피소서.

 

 

posted by 청라

풀의 나라

시/제3시집-춤바위 2013. 8. 8. 08:54

풀의 나라

 

그 섬에 가 보니

거기도 온통 풀밭이었다.

풀 중에 뽑힌 것도

역시 잡초였다.

 

풀들의 시선은

온통 아래쪽으로 기울어 있다.

내 땅 한 뼘 더 늘리려고

촉수를 뻗어 어깨 싸움에만 골몰해 있다.

 

나무는 싹 틀 때부터

하늘 향해 뻗고 있는데

하늘 향한 용틀임은 기억에도 없는

저 풀들의 가난한 꿈

 

미래를 향한 이상도 없고

과거의 썩은 것들만 파먹고 사는

풀의 나라에 가서 나는

부끄럼 모르는 풀밭에

 

눈물 한 방울을 떨구어 주었다.

 

2013. 8. 8

posted by 청라

<해설>

 

절제와 응축으로 피어난 생명 탄생의 신비

                                           엄 기 창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아침 序曲」 전문

 

  위의 시 「아침 序曲」은 1974년 월간「時文學」지에서 주최한 ‘전국 대학생 백일장’에 장원으로 선정되어 『時文學』지에 초회 추천을 받은 시이다. 내가 붓을 꺾지 않고 지금까지 시의 길을 꾸준히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침 序曲」의 장원 입상이 그 때 마침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고 있던 내 자신에게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아침 序曲」에서 용기를 얻어 이 날까지 탈선하지 않고 꾸준히 시를 썼고, 부족하지만 두 권의 시집도 상재하였다. 이 시 이후에 태어난 시들은 이 시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이 시의 자식들이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당신의 대표 시가 무엇이오?” 하고 물을 때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침 序曲」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태화산의 새벽 숲은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맑고 신선하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 나는 공주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고등공민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선생님이 사시던 토굴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숲길을 거닐면서 태화산의 새벽 숲에 매료돼 버렸다. 햇살이 번지기 전의 차갑도록 청신한 공기와 막 잠에서 깨어 “찌르르 찌르르” 울고 있는 나지막한 새들의 울음소리. 어둠 속에 잠들었던 새 생명이 여명 앞에 실체를 드러내어 약동하는 생명 탄생의 신비를 나 혼자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 숲에서 벌어지는 생명 탄생의 모습을 소재로 세상에서 가장 참신한 시를 쓰고 싶었다. 이 세상 그 어느 생명보다 은밀하게 태어나 새벽 숲에 햇살처럼 번져가는 생명을……. 공주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수요문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시를 보는 안목과 시를 쓰는 실력도 많이 성장하였다. 그 때 나는 드디어 오래 간직했던 기억의 창고에서 그 때 그 마곡사의 새벽 숲에서 느꼈던 생명 탄생을 훔쳐보던 감흥을 시로 형상화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조재훈 선생님은 내 첫 시집 『서울의 천둥』작품 해설 「절제와 스밈의 시학」에서 “엄기창의 시는 언어의 경제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느 시, 어느 구절 하나 그냥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길고 긴 이야기와 감추어진 여백의 의미를 가득 넘치게 거느리고 있다. 빠르게 스쳐 읽는 사람에게 그의 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작자가 힘쓴 몇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음미하듯 읽는다면 그의 시가 가진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조재훈 선생님의 평대로 이 시는 극도의 응축과 절제를 통해 만들어진 여백 속에 너무도 정갈하고 신선하여 신비하기까지 한 태화산 새벽 숲에 태동하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형상화한 시이다.

 

(가)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나)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다)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라)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위의 (가)~(라)에서 ‘音’, ‘노래’ 등은 ‘생명’을 상징하는 시어들이다. (가)에서는 이미 만들어져 악보 속에 담겨있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였고, (나)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의 목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생명, (다)에서는 가장 곧고 성센 가지를 골라 생명이 태동하는 모습을 (라)에서는 새로 태어난 생명들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더 이상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언어의 절제 속에 당시 심사위원장이셨던 김남조 선생님께서 “생경할 정도로 참신한 이미지와 그를 받쳐 주는 탄탄한 구조가 너무 아름다워 단시임에도 불구하고 장원으로 선정하였다”는 말씀대로 생명이 탄생하는 숨막히는 순간을 투명하게 그려내었다.

  서정주 선생님은 생명 탄생의 신비를 지켜보는 감흥을 그의 시 「국화옆에서」에서 “노오란 네 꽃잎이 필랴고/ 간밤 무서리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라고 노래하셨고, 이호우 선생님은 그의 시조 「개화」에서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라고 노래하셨다. 고요한 새벽 숲, 새의 목 너머에 숨어있던 새로운 생명이 소리로 튀어나와 햇살처럼 평화롭게 번져가는 모습을 보는 감흥을 나는 너무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일까!

  나는 아파트로 들어오는 입구의 벽에 이 시를 시화로 만들어 걸어놓고 외출했다 들어올 때마다 읊조리며 기도한다. 어린 시절 태화산 새벽 숲에서 보았던 새 생명의 태동과 그로 인한 평화가 이 시로 인해 우리 집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평화를 주기를.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