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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우수憂愁
그대에게 다가가는 길은 끊어지고
오늘따라 어둠은 장막처럼 가로막아
창문에
비친 불빛만
바라보며 서 있다.
글
따뜻한 가을
아파트 안 도로를 차로 달리다가
다리 다친 비둘기 가족을 만나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선다.
경적을 울리면
아기 비둘기 놀랄까봐…….
산을 오르다가
허리 구부러져 누운 들국화를 보면
발을 멈추고 튼튼한 이웃에 기대어 준다.
가벼운 바람에도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잠시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내 따스한 마음 머물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조그마한 나의 온기가
다리가 되고, 날개가 되고
숨결이 되어줄 사람 얼마나 많은가.
단풍잎 붉은 기운이
핏줄을 타고 들어온다.
바람은 차도 가을은 따뜻하다.
2012, 10, 6
글
소나기 마을에서
엄 기 창
가을 햇살이 눈부시어
산새 소리 몇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목넘이고개 올라가 보면
아련한 사랑 이야기
노란 마타리 꽃잎으로 피어난
거기 소나기 마을 그림처럼 있네.
눈 씻고 찾아봐도
소녀는 없고
순원의 유택 앞에 가만히 서니
인생이여!
삶은 무지개 빛 향기 같은 것,
수숫대 엮어 만든 초막 속에
쪼그려 앉아
하루에도 몇 번씩 소나기로 씻어낸
맑아서 눈물 나는
사랑으로 살고 싶어라.
2012. 10. 27
글
중추절 하루
추석빔을 입어야
발걸음에 신이 났다.
아버지를 따라
장다리골 할아버지 댁에
차례 지내러 가는 아침
뒤뜰 벌판 황금빛 물결 밟고 오는
바람만 보아도
배가 불렀다.
제사보다 잿밥에 정신이 팔려
넋 놓고 서 있다가
아랫말 당숙에게 꿀밤 맞고
눈물 찔끔 흘리며 보는 제사상에는
에헴 하고 앉아계실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사과, 배, 대추, 감이 먼저 보였다.
골목길 울리는 풍악소리 신나게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부엉이 울음소리가 동편 산마루에 둥근 달을 불러올리던
어린 날의 꿈같던 하루
모든 날이 한가위만 같았으면……
도회의 잿빛 하늘, 이순이 넘은 나이에도
중추절 아침이면 어깨춤 절로 난다.
글
캘리포니아의 꿈
엄 기 창
지금도 우리는 잊을 수 없네.
캘리포니아의 끝없이 넓은 가슴과
눈빛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던
그곳 사람들의 다정한 마음을…….
샌프란시스코 만(灣)을 따라 돌며
민둥산을 볼 때만 해도
초록빛 연봉(連峰)이 윤기 나는 바람에 펄럭이는
우리 금수강산(錦繡江山)에는 견줄 수 없었지.
롬바르트 언덕에 올라
정갈하게 꾸며진 도시를 바라보거나
요세미티 공원에서
웅장한 산세에 압도되었을 때 우리는 예견(豫見)했었지.
하루 종일 달려도 끝이 안 보이는
캘리포니아의 대 농장 지대
윤기 나는 열매가 태양에 익어가는
아몬드 밭과 포도밭 그 광막한 들판을.
사막을 막고 선 굴강한 사나이의 팔뚝
씨에라네바다 산맥의 발끝을 지나
모하비 사막으로 들어서면
세상은 참으로 넓고 광막하구나.
사막을 꿰뚫고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불가능을 일궈가는 굵은 땀방울을 보았네.
서두르지 않고 죽은 땅을 살려 가는
콜로라도 강물 같은 끈기를 보았네.
부에나 파크 하이스쿨, 스탠포드 대학의
캠퍼스에서 우리는 꿈꾸었지.
저 넓고, 웅장한 캘리포니아, 사나이의 강인한 힘을
우리 아이들 심장 속에 심어주는 꿈을…….
글
서둘러 떠난 사람
- 김명녕 교수님을 떠나보내며
엄 기 창
나는 지금
그대를 위하여 잔을 드노니
그대는 어느 꽃 피는 마을에서 몸을 쉬느뇨.
무뚝뚝한 웃음도
향기롭던 사람아
돌아가는 길은
마라톤처럼 천천히 가지
단거리 달려가듯 서둘러 가서
사랑하는 사람들 눈에
장맛비만 쏟아놓고
할 말 하나 못 전하게 하는 건 무슨 심술이뇨!
다정한 목소리로
‘엄선생’
부를 것 같아
숨죽이고 둘러봐도
그대 떠난 세상 변함없어 서러워
물 젖은 눈으로 서녘 하늘 바라보니
황금빛 노을 사이
그대 가는 뒷모습 보이네.
2012. 8. 16
글
바다
눈을
부릅떠도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아이처럼
한 가슴에
가득 안기는 바다……
2012. 6. 2
글
기다림
연초록 그늘에서
4월 아니 잊고 왔다고
꾀꼬리 호들갑스레 울었다.
꾀꼬리 울음에
온 산 무너지듯
날리는 송홧가루.
하루 종일
내 마음으로 올라오는
저 아래 산길
철 늦은
아지랑이
구름 그림자만 아른거렸다.
2012. 5. 18
글
민들레 연서
대 그림자
창에 어려
문을 열고
나서다.
밝은 달에
마음 들켜
그리움이 떨려서
민들레 꽃술에 담아
연서 하나 띄우다.
달빛 파도 타고
임의 창가에 떨어져
두견새
각혈로
새순 하나 틔우리라.
님이야
나인줄 몰라도
꽃으로 피려 하노라.
2012. 5. 13
글
핑크빛 천사
-충남대학교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를 예찬하며
엄 기 창
끝없이 타오르는 그대들의 기도가
밤새워 지키고 있는 모니터에는
깜박거리는 생명들이
수없이 매달려 있다.
출렁거리던 선들이
일직선으로 무너질 때에
그대들 가슴으로 모여들던
그 긴 겨울밤의 어둠,
하얀 국화꽃을 내려놓던
아픔의 역사도 함께 매달려 있다.
생명의 불꽃 하나를 가꾸기 위해
모두 잠든 새벽에 별처럼 깨어나서
가래를 닦는다.
그르렁거리는 목 너머에서
연약한 생명은 자꾸 꺼지려 하고
지탱하던 팔뚝에서는 힘이 빠지는데,
밤늦게 수술을 마치고 들어온
한 노인의 끝없는 욕설에도
그대들의 얼굴에 환하게 피어있는
연꽃 같은 미소여!
온 세상 가장 밝은 빛만을 모아 밝혀놓은
꺼지지 않는 생명의 등불이여!
난파難破한 목숨들이 널려있는
황량한 중환자실
외로운 망루를 지키고 있는, 그대들은
핑크빛 천사!
2012,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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