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의 수틀

시/제3시집-춤바위 2014. 2. 24. 09:54

누님의 수틀

 

 

누님이 두고 간 빈 수틀을

다락방 구석에서

오십 년 지나 찾아냈는데

누님이 수놓았던 꿈밭 머리에

내 꿈도 얼룩처럼 피어있었다. 

봄나물 향기 캐던 골짜기에는

첫사랑의 산수유꽃 벌고 있었고,

모깃불 향기 안개처럼 흐르던 밤

지천으로 반짝이던 개구리 울음은

별이 되려 반딧불로 솟아올랐다. 

누님이 수놓았던 십자수 속에

회재 고개 너머로만 한없이 뻗어가던

그리움의 바람도 불고 있었고,

끼니를 걱정하던 어머니의 눈망울과

몇 방울의 내 눈물 쑥대풀로 키워주던

구성진 소쩍새 울음 깨어나고 있었다.

누님이 두고 간 빈 수틀엔

비어서 더 가득한 내 어린날이

색실보다 더 고운 내 이야기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살아나고 있었다.



2014. 1. 24

 

posted by 청라

첫사랑

시/제3시집-춤바위 2014. 1. 30. 04:55

첫사랑



첫사랑은 늘

누런 코 훌쩍이던 일곱 살

코찔찔이 시절에 온다.

삘기를 뽑아도

찔레를 꺾어도

엄마 얼굴보다 먼저 아른거리던

마을 누나의 얼굴은

매운 세월의 바람 속에

덧없이 시들었다가

인생이 저무는 예순 살 무렵

어느 깊은 산사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슬픈 전설을 만나면

아픈 옹이처럼 심박혀

움츠러들었던 그 어린 날 진달래꽃은

불길처럼 피어나

온 산을 물들이라 한다.

모든 것을 빨아먹는

늪인 줄 알면서도

온몸을 던져서 투신하라 한다.

 

2014. 1. 30


<대전문학> 2014년 봄호(63호)

posted by 청라

思父 一曲 - 눈길

시조 2014. 1. 10. 10:40

思父 一曲

 

눈길

 

 

아버님 제삿날 저녁 때늦은 春雪로

설화 곱게 피어난 연미 고개 넘으면서

雪花 속 아롱거리는 아버님 모습을 본다.

 

개학 전날 暴雪로 교통이 두절되어

오십 리 넘는 公州 아들 혼자 가는 길에

마음이 애틋하셔서 따라 나선 아버지.

 

눈보라 칼바람에 온몸 꽁꽁 얼으셔서

우성 지난 길가에 주저앉아 떠시면서도

내 옷깃 여며주시던 모닥불 빛 그 손길

 

금강 건너 도심에 한 등 한 등 켜질 무렵

“네 덕분에 먹고 싶던 짜장면 먹는구나”

허기진 젓가락 들어 덜어주던 아버지

 

이제는 짜장면 천 그릇도 살 수 있네.

짜장면 잡숴주실 아버님이 안 계시네.

춘설은 풍요로워도 구름처럼 허전한 길.

 

 

 

2014. 1. 10

 

 

posted by 청라

닭서리

시조 2013. 12. 15. 10:14

닭서리

 

친구 부모 원행 간 집 동네 조무래기 모두 모여,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해 닭서리를 하였는데, 암탉, 수탉 서너 마리

가마솥에 푹푹 삶아 미친 듯이 뜯다 보니 백골만 다 남았네.

 

아침에 닭장에 가신 어머니 비명소리에 혼백이 다 날아가 소화된 닭이

넘어올 듯…….

 

2013. 12. 15

 

 

posted by 청라

동행(同行)

시조 2013. 12. 11. 10:57

동행(同行)

 

누군가 새벽 산길

혼자 넘은

외발자국

 

그의 삶에 기대면서

그의 마음 밟고 간다.

 

외로운

눈길에 깔아놓은

털옷처럼 따스한 정.

 

 

닫은 문 귀를 열면

앞서 간 이

내미는 손

 

어디선가 밀어주는

함성 소리 밟고 간다.

 

고갯길 막막하여도

인생은 동행이다.

 

2013. 12. 11

 

 

posted by 청라

어느 가을 날

시/제3시집-춤바위 2013. 11. 11. 08:51

어느 가을 날

 

회초리를 놓고서

국화꽃을 들고 간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하늘빛을 닮은 가을날에

 

교실 구석엔

아직도 오지 못한 한 아이의 자리

어둠에 묻혀 있고

 

일찍 들어선 겨울이

군데군데 눈처럼 쌓여

그림자를 만드는데

 

땡감 맛 논설문을 배울

교과서는 덮어놓자.

꽃물 번져가는 교정의 나무들 꿈꾸는  

무지개 빛깔 시 한 수 읊어보자.

 

국화 향 은은한

시로 닦아낼 수 있는 그늘이

아주 작더라도

 

한 발짝 먼저 나가지 않으면

어떠리.

아이들 마음이 풍선으로 떠올라서

하늘에 닿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

 

 

 

2013. 11. 10

 

 

posted by 청라

바다

시/제3시집-춤바위 2013. 10. 23. 12:00

바다

 

바다가 어디

깊은 산골 맑은 물만 받아

저리 맑은가?

 

끊임없이 黃河를 가슴에 품고서도

씻고 또 씻어

 

바다는 금방 하늘을 닮는다.

 

2013. 10. 23

 

posted by 청라

미소 지킴이

시조 2013. 10. 20. 09:42

미소 지킴이

 

미소가 등불처럼 고여 있는 아내의 입가

수삼 년 꽃 못 피운 동백나무 심고 싶다

미소를 자양분 삼아 꽃잎 활짝 피어나게

 

어렵게 피어난 꽃 온 계절 지지 않게

작은 내 관심에도 햇살 같은 아내 얼굴

행복한 아내 얼굴에 미소지킴이 되고 싶다.

 

2013. 10. 20

 

2013년 <문학사랑> 겨울호

posted by 청라

序詩

시/제3시집-춤바위 2013. 10. 12. 22:30

序詩

 

황토 물에 떠내려가는

母國語

한 조리 일어

내 시를 빚었다.

 

거친 모래밭에 피어난

풀꽃 송이들아

 

반딧불로

불씨를 살려

사람들의 가슴마다

진한 香氣의 모닥불을 피워 주거라.

 

2013. 10. 12

posted by 청라

廢寺의 종

시조 2013. 10. 9. 08:59

의 종

 

-빛 단풍이 타오르는 골짜기에

기와지붕 허물어져 비새는 절 추녀 끝에

썩다 만 조롱박처럼 매달린 종 하나.

 

오랜 세월 울지 못해 울음으로 배부른 종

소쩍새 울음으로 달빛으로 키운 울음

종 벽 속 꿈틀거리는 용암 같은 피울음.

 

이순 넘은 삶의 망치 꽝 하고 두드리면

산사태 몰아치듯 사바까지 넘칠 울음

종 채를 들었다 놨다 가을 해가 기우네.

 

2013. 10. 9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