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음得音

득음得音

 

 

상수리나무 잎새에 매미 소리가 박혀있다

한 달의 득음得音을 위해

칠 년을 침묵의 폭포 아래서 피를 토한

고단한 생애가 판화처럼 찍혀있다

매미는 알았을 것이다 때로는 덧없는 길도

묵묵히 걸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노래 한 곡 반짝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무명가수의 뒷모습이나

하루의 삶도 보장받지 못하는

하루살이의 우화羽化

결코 부질없는 생애는 아니라는 것을

매미가 한 달을 소리쳐 울기 위해

칠 년을 고행 하듯이

시 한 편 남기기 위해 메아리 없는 외침

수도 없이 외쳐대는 시인들이여

모아이 석상처럼 매미는 시력을 반납한 채

껍질로 남아 지켜보고 있다

자신의 득음得音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려줄 것인지

사람들의 가슴에서 꽃으로 피어날 것인지

세상에 무의미한 생애란 없다

 

posted by 청라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

 

 

가을은

오래 묵혀두었던 그리움을

꺼내보게 하는 계절

 

은행잎마다 내려앉은

노란 그리움에 같이 물들다 보면

서랍 속에 넣어둔 편지를 읽게 된다

 

그리움은 나비이다

 

보고싶다보고싶다보고싶다

갈바람 한 줌에도

무수히 날아오르는 그리움의 군무

 

진정한 그리움은

너에게 닿지 못 한다

간절함의 무게로 떨어져 흙이 된다

 

줍지 마라

흘러간 사랑은

흙이 묻은 채 그냥 놓아두어라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

posted by 청라

가을의 파편

 

 

조그만 은행잎엔

오롯이 가을이 담겨있다

 

속삭이는 햇살과 나른한 눈빛

포근히 안아주는

고향의 마음

 

나는

가을이 가장 눈부시게 내려앉은

은행잎 한 장 가슴에 깔고

세상에 반짝이는 모든 슬픔들

널어 말린다

 

꽃처럼 떨어진 젊음들과

레일에 깔린 비명

노릇노릇 향기롭게 말라갈 때쯤

 

!

세상의 눈물들아 이젠 모두 가자고

나비처럼 모여 팔랑대는 가을의 파편

 

posted by 청라

경고

시조/제3시조집 2022. 11. 3. 07:37

경고

 

 

있을 때 이 말 하고

없을 땐 저 말 하고

 

수시로 말 바꾸어

세상을 희롱하면

 

언젠가 큰 코 다치리

큰 일 하는 사람들아

posted by 청라

단풍

시조/제3시조집 2022. 10. 26. 07:30

단풍

 

 

 

 매미들아 지난여름

한스럽게 울어대더니

 

잎새마다 진한 멍울

양각으로 찍혔구나

 

사람들

가슴마다로

옮겨 붙는 저 아픔

posted by 청라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날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posted by 청라

어머니가 고향이다

시조/제3시조집 2022. 9. 7. 21:40

어머니가 고향이다

 

 

어머니 없는 마을은 고향도 타향 같다

어둔 밤 재 넘을 제 마중 보내 반긴 불빛

된장국 끓이던 향기 잡힐 듯이 그립다

 

빈 집의 살구꽃은 왜 혼자서 타오르나

돌절구 돌 맷돌은 버려진 채 비를 맞고

노을 녘 부르던 목소리 귀에 쟁쟁 울려온다

 

어머니 가시던 날 고향도 따라갔나

어린 날 추억들은 밤 새 소리에 아득하다

허전해 돌아가는 발길 어머니가 고향이다

 

 

posted by 청라

벌레의 뜰

 

 

화랑곡나방 한 마리

회백색 호기심 활짝 펴고 내 주위를 선회한다

시가 싹트는 내 서재는 벌레의 뜰이다

어디에서 월동했다 침입한 불청객일까

날갯짓 몇 번으로 시상詩想에 금이 마구 그어진다

홈·키파 살그머니 든다

그리고 놔두어도 열흘 남짓인 그의 생애를 겨냥한다

내 살의殺意가 뿜어 나오고 떨어진 그의 절망을

휴지에 싸서 변기에 버리면

깨어진 시가 반짝반짝 일어설까

창 넘어서 보문산이 다가온다

고촉사 목탁소리가 함께 온다

벌레야 벌레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나도 한 마리 나방

푸르게 날 세웠던 살생을 내려놓는다

벌레하고 동거하는 내 서재는 수미산이다

posted by 청라

물 위에 쓴 편지

시조/제3시조집 2022. 9. 1. 19:58

물 위에 쓴 편지

 

 

물오리 한숨 풀어

물 위에 편지를 쓴다

썼다 지운 이야기는

꽃잎으로 떠도는가

옛날은 희미해지고

향기만 가득 풍겨온다

posted by 청라

4월의 눈

4월의 눈

 

 

잠 안 오는 밤 접동새 불러

배나무 밭에 가면

4월에도 눈이 온다

보아라!

푸른 달빛 아래

다정한 속삭임의 빛깔로 내리는

저 아름다운 사랑의 춤사위

외로움 한 가닥씩 빗겨지며

비로소 지상에는 빛들의 잔치가 시작된다

배꽃이 필 때면 돌아오겠다고

손 흔들고 떠난 사람 얼굴마저 흐릿한데

사월 분분히 날리는 눈발 아래 서면

왜 홀로 슬픔을 풀어 춤사위로 녹이는가

접동새 울음은 익어

은하수는 삼경으로 기울어지고

돌아온다는 언약처럼

분분히 무유의 흙으로 떨어지는 꽃잎

돌아서서 눈물을 말리는 것은

다정도 때로는 병이 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