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雪花

설화雪花

 

 

옷 벗은 빈 산하山河엔 달빛이 창백한데

홀연 함성처럼 일어서는 북 소린가

새벽에 박수 치며 온 저 사나이 너털웃음

 

시들었던 팔과 다리 넘치는 빛의 향연饗宴

깨어진 아픔 위에 덧 피어난 무궁화여

청년아, 서릿발 같은 깃발 하나 세우거라.

 

 

2020. 1. 5

posted by 청라

아내의 푯말

아내의 푯말

 

 

아내가

가슴 속에

푯말 하나 세웠다기에

깊은 밤 꿈을 열고

마음 살짝 엿봤더니

정 헤픈

남자는 사절"

붉은 글씨로 써 있네.

 

 

2019. 12. 14

 

posted by 청라

가을 연서

가을 연서

 

단풍 물에 담갔다가 국화 향에 말린 사랑

종소리에 곱게 담아 가을 연서 보내주면

네 가슴 굳게 닫힌 문 까치집처럼 열릴까

 

 

2019. 10. 25

posted by 청라

호수

호수

 

물안개

돌개바람

못 말리는 개구쟁이

 

앞산을

간질이다

싫증 난 저 심술이

 

잠자던

물새 몇 마리

토해내고 있구나.

 

posted by 청라

부처님 웃음

부처님 웃음

 

부처님 웃음 길으러

마곡사麻谷寺 다녀오는 길에

산 아래 찻집에서

한 바가지 떠 주었더니

웃음 탄 연잎 차 맛이

향내처럼 맑고 깊다.

 

덜어도 줄지 않는

저 무량無量한 자비慈悲의 빛

구름 낀 세상마다

꽃으로 피는 저 눈짓을

아내여, 혼자 보라고

대낮같이 밝혔겠는가.

 

향불 꺼진 법당에서도

을 건너 웃는 뜻은

사바 업장 쓸어내는

범종소리 울림이라

오가며 퍼준 그릇이

텅 비어서 가득 찼네.

 

 

2019. 10. 5

 

posted by 청라

산촌의 겨울

산촌의 겨울

 

아무도 오지 않아서

혼자 앉아 술 마시다가

 

박제剝製로 걸어놨던

한여름 매미소리

 

나물 안주삼아서

하염없이 듣는다.

 

방문을 열어봐야

온 세상이 눈 바다다.

 

빈 들판 말뚝 위의

저 막막한 외로움도

 

달콤한 식혜 맛처럼

복에 겨운 호사好事거니.

 

가끔은 그리운 사람

회재 고개 넘어올까

 

속절없는 기다림도

쌓인 눈만큼 아득한데

 

속세로 나가는 길이

꽁꽁 막혀 포근하다.

 

 

posted by 청라

어머니 마음

어머니 마음

 

어머니 오시던 날

보자기에 산을 싸 와

 

비었던 거실 벽에

산수화로 걸어 두어

 

지쳐서 눈물 날 때마다

바람소리로 다독이네.

 

 

2019. 10. 2

 

 

posted by 청라

풍악산豊岳山

풍악산豊岳山

 

털털하게

섞여서 산다.

정 많은

사내처럼

 

뾰족했던 젊음들을

익히고 다스려서

 

온 산이 눈부신 환희歡喜로 타오르고 있구나.

 

 

2019. 10. 1



posted by 청라

꽃씨

꽃씨

 

코스모스

까만 꽃씨에

숨소리가 숨어있다.

 

살며시 귀를 대면

솜털 보시시한

 

벽 깨자

삐약 하고 울

박동搏動소리가 숨어있다.

 

 

2019. 8. 28

posted by 청라

거꾸로 선 나무

거꾸로 선 나무

 

세상은 안개 세상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옳은 것 그른 것도 능선처럼 흐릿하다.

물 아래 물구나무로 입 다물고 섰는 나무.

 

거꾸로 바라보면 세상이 바로 설까

호수에 그림자로 뒤집어 다시 봐도

정의도 불의도 뒤섞여 얼룩덜룩 썩고 있다.

 

여명이 밝아 와도 배는 띄워 무엇 하랴.

부귀도 흘러가면 한 조각 꿈인 것을

차라리 물 깊은 곳에 집을 틀고 싶은 나무

 

 

2019. 9. 25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