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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늦가을 저녁
가로수들이 옷을 벗는다.
드러난 알몸들이
빗물에 젖는다.
오래 숨겨 두었던 진실이
앙상하게 바람을 맞는
저녁이 되면
나도 이름을 벗고
생활을 털고
어디 멀리로 떠나가고 싶다.
산사의 창 너머로
낙엽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들으며
차를 마시기도 하고
갈매기 소리 파도에 씻기는
이름 모를 항구에
정박하고도 싶다.
비상하려다
늘 주저앉는 프라타너스 이파리처럼
내 소망의 날개도 떨어져 수없이 밟히는 저녁…….
글
해돋이
그믐밤 별빛으로
불씨를 묻었다가
파도에
몸을 맡겨
씻기고 씻긴 사랑
더운 피 온 몸을 태워
어둔 세상 밝힌다
글
비온 날 아침
말갛게 정화된 아침 햇살에
흉몽을 헹구며
신문을 본다. 활자마다 가득
어둠이 고여 있다.
간 밤 가랑비로 닦아 낸 하늘 아래
은행잎 하늘하늘 내리고
내리는 은행잎엔 가을이 더 노랗게 익어 가는데
비는
사람의 마음까진 빨아낼 순 없는 것일까
저기 밤 그림자가 남아있는 고층 빌딩이며 후미진 골목마다
어느 죄악의 독버섯이 자라고 있기에
신문을 보면 나는 이리 떨리는 것일까.
비야, 늦 피는 국화 봉오리에 새 숨결 불어넣는
비야,
나를 닦아 내다오.
이 세상을 닦아 내다오.
푸석거린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찾는
신문의 칸칸마다 네 맑은 영혼으로 정화시켜다오.
매일 아침 되씹는 절망을 접으며
오늘도 나는 웃는 연습을 한다.
글
등산
가끔은 멈춰 서서
산 빛 속에 정을 주면
초록빛 일색 속에
수만 빛깔 산의 마음
살며시
가슴으로 와
실뿌리를 내린다.
기슭마다 서려 있는
이슬만큼의 산의 눈물
새소리로 속삭이는
산의 말씀에 눈 귀 닫고
서둘러
정상에 오를수록
하늘과는 멀어진다.
글
계룡산의 10월
시월 계룡산은
타오르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골짜기마다 우웅 우웅
수많은 소리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눈빛 속으로 빨려 들면
온종일 맴돌며
나올 수가 없었다.
삼불봉에서
황혼을 타서 마시는
바람 한 모금
나도 가슴 뜨거운 가을 산이 되려는지
내뿜는 호흡마다
붉은 기운이 떠돌았다.
글
연화교에서
시냇물은 서 있는데
다리에 선 나는 흘러간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목탁소리 눈을 뜨면
안개 낀 다리를 건너
손짓하는 사바의 마을
글
고리
오늘 저 잠자리가 죽으면
내일은 또 무엇이 죽을까
각혈로 떨어진 봉숭아꽃 잎새 위로
잠자리 날개 하나
등 돌리고 있다.
파문 일던 하늘 한 자리 비어 있다.
동편 산자락에서 뽑혀버린 무지개처럼
허리 부러진 초록빛 고리,
내일 참새 그림자 사라지고
모레 독수리 그림자 사라지고
비어 가는 세상
사람들만 남는 세상…….
글
아파트의 눈
수만의 벌떼다.
날아올라 꽃을 찾다
시멘트벽에 부딪혀
더러는 눈물 되고
솔잎에 내려와 앉아
순백의 넋으로 핀다.
글
멧새
한 그루 남아있는
측백나무 위에
멧새가 날아와 울고 있다.
멧새 울음으로 화안해진
내 뜰, 영산홍 꽃가지 위로
산 속 이야기들이
방울방울 피어난다.
도시의 비명들이
담 밖에서
고개를 길게 빼고 넘겨다 보다 달아난다.
살아있는 숨결로 들어선
초록빛 평화
멧새의 작은 그림자 뒤에서
거대하게 일어서는
산
글
여백
벽을 비워 놓았더니
산이 들어와 앉아 있다.
꽃향기
골물 소리
집안 가득 피어난다.
채우고 채워진 세상
하나 비워 얻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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