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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가슴 사이
음력 8월 열 사흘 달빛이 밝았다. 달은 롯데 백화점의 동편 하늘에 둥그렇게 떠올라 도시의 모든 불빛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온 도시를 제 세상인 양 밝히고 있었다. 모처럼 만나 저녁 식사와 곁들여 수다를 떨다가 일어선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는 남사장의 얼굴이 전에 없이 환하다.
“아니 남 사장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얼굴이 완전 꽃처럼 폈는데”
“엄 선생님 저 이번 추석엔 서울 동생 집으로 차례 지내러 가요. 동생이 퇴직하고 제사 가져갔 어요.”
남 사장의 남동생은 경찰서장까지 지낸 경찰 고위직에 있는 인물이었다. 너무 바빠서인지 아니면 기독교를 믿어서인지 평생 외아들인 동생 에게만 정성을 쏟은 부모님의 제사도 몰라라 한다고 남 사장은 늘 푸념을 하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굶길 수 없어 장녀인 남 사장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자주 동생 욕을 하였다.
“아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제사 가져갈 생각을 다 했을까?”
나의 물음에 남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였다. 그동안 출가외인인 큰누나가 부모님 제사를 지내서 늘 목에 무엇이 걸린 것처럼 답답했단다. 그래도 직장이 서울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데 제사 지내러 서울 집에 가기도 그렇고 해서 나 몰라라 했다는 것이다. 늘 머리 속에서는 제사를 가져오라 하는데 가슴 속에서 거부해서 실행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공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제일 먼저 이성이 시키는 대로 누님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자식이 제 마누라랑 와서 찔찔 울면서 죄송하다고 하는데 배길 수가 있어야지. 얄 미워서 평 생 안 보고 살려고 했는데”
말하는 남 사장의 표정이 보름달보다도 더 밝다. 평소엔 자주 우울한 얼굴을 했었는데 마음속의 근심이 모두 해소된 모양이었다. 남의 며느리로서 시집에서 친정 부모 제사 지낸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남 사장 동생도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차가운 이성은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데 뜨거운 감성은 내키지 않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기는 하지만 늘 살밑에 가시가 박힌 채로 살아가는 듯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머리에서 말하는 바른 소리를 가슴이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거리인 60cm, 어떤 사람은 평생 이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몸이지만 유리된 채 괴로워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머리에서 가슴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를 정신적으로 좁혀서 늘 머리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2017. 2. 7
글
제비꽃 편지
별을 따다가 뿌려놓은 듯
제비꽃 모여 피었습니다.
햇살은 꽃밭에만 흥건히 고여
등잔불 연기처럼
아지랑이를 피워 올립니다.
어느 날 갑자기
처마 밑에 제비 날아와 울 듯
그렇게 오셔요.
들불처럼 번져가는 자줏빛 함성.
2017.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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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등천에서
열병식 하듯 줄지어선
갈대들의 춤사위도 시들해지고 있었다.
해오라기 눈동자가
물비늘로 일렁이는 여름날 오후
스쳐가는 사람들은 모두 타인이었다.
내 그림자 혼자 따라와
반짝이는 외로움
저기 가장교 물아래로 달리는
트럭의 바큇살마다
비누거품으로 만든 구름이 피어나고
발을 다친 소음騷音들은
모두 유등천으로 내려와
뿌연 물이끼로 자라고 있었다.
일광의 화살들을 막고 서있는
버드나무 아래엔 손수건만한 그늘 하나
어딘가로 보내는 간절한 소식처럼
계룡산 쪽으로
새 한 마리 띄워보낸다.
2017. 1. 17
<대전문학>75호(201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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