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마을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2. 10. 28. 01:53

소나기 마을에서

                              엄 기 창

 

가을 햇살이 눈부시어

산새 소리 몇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목넘이고개 올라가 보면

 

아련한 사랑 이야기

노란 마타리 꽃잎으로 피어난

거기 소나기 마을 그림처럼 있네.

 

눈 씻고 찾아봐도

소녀는 없고

 

순원의 유택 앞에 가만히 서니

인생이여!

삶은 무지개 빛 향기 같은 것,

 

수숫대 엮어 만든 초막 속에

쪼그려 앉아

하루에도 몇 번씩 소나기로 씻어낸

 

맑아서 눈물 나는

사랑으로 살고 싶어라.

 

2012. 10. 27

 

 

 

posted by 청라

중추절 하루

시/제3시집-춤바위 2012. 9. 13. 13:24

중추절 하루

 

추석빔을 입어야

발걸음에 신이 났다.

 

아버지를 따라

장다리골 할아버지 댁에

차례 지내러 가는 아침

 

뒤뜰 벌판 황금빛 물결 밟고 오는

바람만 보아도

배가 불렀다.

 

제사보다 잿밥에 정신이 팔려

넋 놓고 서 있다가

아랫말 당숙에게 꿀밤 맞고

눈물 찔끔 흘리며 보는 제사상에는

 

에헴 하고 앉아계실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사과, 배, 대추, 감이 먼저 보였다.

 

골목길 울리는 풍악소리 신나게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부엉이 울음소리가 동편 산마루에 둥근 달을 불러올리던

어린 날의 꿈같던 하루

 

모든 날이 한가위만 같았으면……

도회의 잿빛 하늘, 이순이 넘은 나이에도

중추절 아침이면 어깨춤 절로 난다.

posted by 청라

캘리포니아의 꿈

시/제3시집-춤바위 2012. 9. 11. 08:55

캘리포니아의 꿈

 

엄 기 창

 

 

지금도 우리는 잊을 수 없네.

캘리포니아의 끝없이 넓은 가슴과

눈빛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던

그곳 사람들의 다정한 마음을…….

 

샌프란시스코 만(灣)을 따라 돌며

민둥산을 볼 때만 해도

초록빛 연봉(連峰)이 윤기 나는 바람에 펄럭이는

우리 금수강산(錦繡江山)에는 견줄 수 없었지.

 

롬바르트 언덕에 올라

정갈하게 꾸며진 도시를 바라보거나

요세미티 공원에서

웅장한 산세에 압도되었을 때 우리는 예견(豫見)했었지.

 

하루 종일 달려도 끝이 안 보이는

캘리포니아의 대 농장 지대

윤기 나는 열매가 태양에 익어가는

아몬드 밭과 포도밭 그 광막한 들판을.

 

사막을 막고 선 굴강한 사나이의 팔뚝

씨에라네바다 산맥의 발끝을 지나

모하비 사막으로 들어서면

세상은 참으로 넓고 광막하구나.

 

사막을 꿰뚫고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불가능을 일궈가는 굵은 땀방울을 보았네.

서두르지 않고 죽은 땅을 살려 가는

콜로라도 강물 같은 끈기를 보았네.

 

부에나 파크 하이스쿨, 스탠포드 대학의

캠퍼스에서 우리는 꿈꾸었지.

저 넓고, 웅장한 캘리포니아, 사나이의 강인한 힘을

우리 아이들 심장 속에 심어주는 꿈을…….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