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안에서

 

막차 안에서




막차는 차갑게 식어

어둠에 풀린다.

흙으로 돌아가듯

남은 사람 훌훌 털어버리고

잠잠히 가라앉은 마지막 자유

떠난 사람들이 비운 자리를

혼자 채우고 앉아 있다.

모두 잠든 세상을 홀로 깨어서

마음으로나 들을 수 있는

눈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환히 뻗어 온 뒷길을 밝혀

어둠 속 낯선 길 한 번 걸어가 볼까

창문에 초침이 멎은

손목이 크게 비치고

긴 밤과 끝없이 싸우는 사내

하얀 얼굴이 보인다.


posted by 청라

대숲 속에서


대숲 속에서

 

淸羅 嚴基昌

세상에서 깨어진 바람으로

대숲으로 와

초록빛 대바람에 살을 섞는다.

藥水처럼 몇 모금

새어 내리는 하늘을 마시고

대나무의 곧은 음성으로 일어선다.

산 뻐국새 울음소리에

아픈 마음 아픈 살 도려내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지

대바람소리 앞세우고 가

거리의 모든 어둠을 쓸어 내리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마다

둥글게 빛이 集中해 오고

빛을 통해서 바라보는 먼 마을엔

남기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

대나무 뿌리에서 몸을 세운 나의 천둥은

한 올씩 한 올씩 빗질되어 가라앉고

나는

다시 초록빛 갈기 휘날리는 바람

맨발로 맨발로 대밭을 나선다.



posted by 청라

도회의 나무


도회의 나무

淸羅 嚴基昌
옥상 위에는
헐벗은 마음을 달래려는
화단이 하나 있고
고향을 잃은 나무들이
창백한 낯으로 졸고 있다.
용암이 끓는 지열 대신에
늘 싸늘한 콘크리트
절망을 딛고 서서
땡감빛 햇살만 넝마처럼 걸치고
발 하나 마음대로 뻗지 못하는
토박한 발아래 저 밑 세상엔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질경이처럼 모여 살고 있다.
기다림이 있는데, 화단엔
까치 울음 한 파람 반짝이지 않고
어쩌다 길 잘못든
멧새 한 마리
빌딩 너머 먼 산만 바라보며 나직이 운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