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연서

가을 연서

 

단풍 물에 담갔다가 국화 향에 말린 사랑

종소리에 곱게 담아 가을 연서 보내주면

네 가슴 굳게 닫힌 문 까치집처럼 열릴까

 

 

2019. 10. 25

posted by 청라

슬픔의 법칙

 

사람은 태어나는 날

누구나 다 슬픔도 예약 받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날을 위하여

미리 슬퍼할 필요는 없다.

멀리 떨어진 슬픔을 마중 나가

조급하게 아파하다가

익기도 전에 떨어질 필요는 없다.

아직 오지 않은 아픔을

미리 아파하지 말자.

아직 오지 않은 슬픔을

미리 슬퍼하지 말자.

오늘의 작은 행복도 가꾸고 즐기면서

남은 햇살에 느긋하게 익어가자.

 

2019. 10. 25

posted by 청라

호수

호수

 

물안개

돌개바람

못 말리는 개구쟁이

 

앞산을

간질이다

싫증 난 저 심술이

 

잠자던

물새 몇 마리

토해내고 있구나.

 

posted by 청라

삼십 년만 함께 가자

 

아내의 오른쪽 뇌가

휑해진 사진을 보고는

입만 떡 벌리고 있다가

 

이래서는 안 되지

 

다음날 새벽부터

견과류 찾아 먹이고

오메가 쓰리 먹이고

 

아침식사 후엔

아리셉트, 글라이티린

챙겨주고

 

침대 이불은

아내 쪽 머리 부분

구김이 안 가도록 잘 펴놓는다.

 

아내야!

이대로 삼십 년만 지금같이 가자.

 

잃은 것은

잃은 것대로 그냥 놓아두고

이대로 삼십 년만 지금같이 가자.

 

비오는 저녁에도

아내의 손을 끌고 유등천변을 걸으며

, , 부처님, 십자가 안 가리고

어디나 고갤 숙이는 버릇이 생겼다.

 

 

2019. 10. 19

posted by 청라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싶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구름 끼는 일처럼 무심해진

세월이지만

비오는 날엔 대전역에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이별을 하고 싶다.

눈물 보다는 웃음을 더 많이

보여주리.

미워하기보다는 행복을 빌어주면서

그리움으로 가꾸면

이별도 꽃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리.

보내고 돌아서면 온 세상 빗물이 모여

내 가슴 온통 눈물바다가 될 지라도

꽃이 흔들리는 것처럼 손 흔드는

그런 이별을 하고 싶다.

 

2019. 10. 18

시문학581(201912월호)

posted by 청라

대전역에서

 

 

보문산 뻐꾸기 노래처럼

들리다

안 들리다 하는 게 사랑이다.

 

울지 마라.

웃으면서 손 흔들고

돌아서서 눈물 흘리는 게 진짜

충청도 사랑이다.

 

작년 가을에

울면서 떨어지던 잎들도

말간 웃음으로 새롭게 등을 켜지 않느냐.

 

돌아서지 마라

아주 돌아서지만 않는다면

다시 돌아와 부둥켜안는 곳이

대전역이다

 

 

 

2019. 10. 10

대전문학91(2021년 봄호)

 

posted by 청라

권력의 법칙

 

옥양목 하얗게 옷 지어 입어도

세월 흐르면 때가 묻지

조금씩 검어지다가

원래가 검었던 듯 번질거리지.

 

정의로 일어선 권력도

세월 흐르면 때가 묻지

조금씩 더러워지다가

원래의 불의보다 더 뻔뻔해지지.

 

네 얼굴 한 번

맑은 거울에 비춰보아라.

 

비바람 속에서

늘 하얀 옥양목 어디 있으랴

썩지 않는 권력이 어디 있으랴.

 

 

2019. 10. 9

posted by 청라

[다시 쓰는 금강] 금강 - 엄기창(1952~)


김완하(시인·한남대 교수)

김완하 시인·한남대 교수

 

 

강 윗마을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초록빛 섬에
물새는 늘 구구구
꿈꾸며 산다.
숨 쉬는 물살 그 가슴에
한 송이씩
봉숭아 꽃물 빛 불이 켜지면
미루나무 그늘을 덮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말갛게 씻겨
모래알로 가라앉고
혹은강둑 이름 모를 풀꽃으로 피는데
강심에 뿌리 내린 바위야
나도 이 비단결에
곱게 새겨지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


이 세상 마을은 모두 강 윗마을과 강 아랫마을로 나뉜다. 그래서 두 마을 사이 강은 흐른다. 강의 흐름은 윗마을과 아랫마을 이야기 잇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강이 흐르면 사람들 모여들어 더 큰 삶의 강을 펼친다. 그 강 위로 사랑을 나르는 구구구 물새들. 아, 아침 안개 걷히는 강둑 위로 이름 모를 풀꽃도 피어 우우우 노래한다. 강 속으로 힘차게 밀며 가는 물살 그 가슴에 봉숭아 꽃물 빛 등을 켠다.
사람들 삶은 강둑에 이름 모를 풀꽃으로 피어나 흐르는 물에 말갛게 씻긴다. 강은 시간을 쟁이며 흘러 고운 모래로 쌓인다. 누구라도 금강에 오면 비단결 순한 강 자락 위에 곱게 새겨지는 이름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금강에 살면 금강을 닮고, 금강 닮은 아이를 낳고. 금강의 미소를 닮아 점점 금강으로 이어져 하나의 금강이 된다. 하여 진정한 금강으로 살아가는 자 백성 아니던가. 그가 바로 시민 아닌가.

posted by 청라

계영배戒盈杯

수필/서정 수필 2019. 10. 7. 10:58

계영배戒盈杯

 

  등산길에 한 친구가 K선생님 소천 소식을 전했다. 약간 시끄럽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니 그렇게 건강하고 열정적이던 분이 왜 갑자기?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짐작하는 바는 있는 것 같았다. 노욕老慾이 그 분을 망쳤을 것이다. 교수로 정년퇴임을 했으면 조용히 쉬면서 못다 한 학문 연구나 하실 것이지, 다 늦게 웬 사립전문학교 총장을 한다고 그 고생을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송사訟事에 휘말려 갖은 고통을 겪었으니 강철 같은 그분의 정신력으로도 아마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나친 욕심은 몸을 망친다. 나는 문득 계영배戒盈杯의 교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계영배戒盈杯란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술 어느 한도 이상 따르면 술잔 옆에  구멍으로 술이 새도록 만든 잔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에 춘추오패春秋五覇하나인 제환공齊桓公군주의 올바른 처신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려고 늘 곁에 놓아두고 마음을 가지런히 했던 그릇(欹器)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 불리기도 했다. 순자荀子에서 보면, 후에 공자孔子가 제환공의 사당을 찾았을 때 그릇에 구멍이 뚫려 있음에도 적당할 땐 술이 새지 않다가 지나치게 채웠을 때 술이 새는 이 잔을 보고 제자들을 둘러보며, 총명하면서도 어리석음을 지키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도 겸양하며, 용맹을 떨치고도 검약하며, 부유하면서도 겸손함을 지켜야한다며 이 그릇의 의미를 가르쳤다고 한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는 온 세상을 생명력이 넘치게 한다. 말랐던 논과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고, 시들거리던 초목도 기운을 차려 보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푸르고 싱싱하게 한다. 그러나 이 비가 지나치게 내려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일면 오히려 이 땅에 커다란 재앙이 되는 것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젊은 시절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기운도 능력도 떨어질 때가 되면 지나친 욕심은 내려놓아야 한다. 술을 어느 한도 이상 채우면 술이 새도록 만든 잔처럼 욕심이 지나쳐 몸을 망칠 때쯤이면 스스로 정화시킬 수 있는 자기 처신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2019. 10. 7

 

 

 

posted by 청라

부처님 웃음

부처님 웃음

 

부처님 웃음 길으러

마곡사麻谷寺 다녀오는 길에

산 아래 찻집에서

한 바가지 떠 주었더니

웃음 탄 연잎 차 맛이

향내처럼 맑고 깊다.

 

덜어도 줄지 않는

저 무량無量한 자비慈悲의 빛

구름 낀 세상마다

꽃으로 피는 저 눈짓을

아내여, 혼자 보라고

대낮같이 밝혔겠는가.

 

향불 꺼진 법당에서도

을 건너 웃는 뜻은

사바 업장 쓸어내는

범종소리 울림이라

오가며 퍼준 그릇이

텅 비어서 가득 찼네.

 

 

2019. 10. 5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