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思母 十題 6

 

기다림

― 思母 十題 6

살구꽃이 피면서

그늘 속에 숨어있던 마지막 겨울이

은은한 봄향기에 녹아듭니다.

마곡사에서 띄워 보낸 풍경소리가

태화천 물소리 속에 더 맑게 들리고

가리마처럼 정결하던 남가섭암 가는 길에도

연초록 봄 물결이 넘실댑니다.

속삭이는 봄바람이 살구꽃 가지 스칠 때마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어머님 자취를 찾아봅니다.

살구꽃 꽃등은 기세 좋게 타오르는데

굳게 닫힌 대문은 적막합니다.

오늘 아침 쓸어놓은 마당의 빗자국마다

햇살은 투명하게 내려와 속살거리고

어젯밤 꿈밭에서 생시처럼 앉아 계시던

우물 가 돌 위에는 구름 그림자만 어른댑니다.

아침 내내 살구꽃 망울 틔워주던

까치 울음소리도 보이지 않고

화향이 폭죽처럼 번져가는 들판으로

하루는 빨리 가서

철성산 저녁 어스름이 내려옵니다.

대문을 열고 나가 어릴 적 그 바위에 앉아 기다리면

장에서 돌아오듯 산모롱이로

아른아른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한데

어머님 기다리는 살구꽃 핀 날 하루는

知天命의 나이에도 어린애 되는

어머님!

소리쳐 불러도 메아리만 대답하는

산천에 봄이 왔지만

내 가슴은 겨울입니다.

posted by 청라

어머님 제삿날

 

어머님 제삿날

마당 쓸고 마루 닦고

새 옷 입고 문간에 서


산모롱이 바라보며

어머님 기다리니


까치들도 소리를 모아

하루해를  지운다.

posted by 청라

돌무덤

 

돌무덤

애동솔 숲 돌무덤에

자줏빛 도라지꽃

육이오 사변통에

하늘 가신 형님 모습

두견새 목청을 빌어

밤새 울어댑니다.


눈 가만 감으시고

형님 얘기 하실 적에

입가엔 웃음 짓고

눈 가엔 이슬 맺혀

피멍울 끌어 앉고서

평생 사신 어머님.


치마끈에 달랑대던

고사리손 그리워져

돌무덤 곁 지날 때에

눈 감고 걸으시던

어머님 아린 가슴에

뽑혀지지 않는 대못.

posted by 청라
 

49재(四十九齋)

― 思母 十題 5

어디로 떠나가려고

영가의 눈빛 아롱아롱 흔들리는가

목탁소리 따라 만수향은 사위어

어머님 영혼

이 세상 남은 시간도 조금씩 줄어듭니다.

생전에 못 사드린 과일로

제사상을 채우며

이제는 장식에 지나지 않음에 가슴 아파합니다.

육신은 보내고 혼만 남아

어두운 곳에 숨어 자식 걱정으로 떨다가

빗소리에 젖지 않는 빛나는 길을 따라

머언 길 떠나려고 가슴 앓는 어머님

노스님 외시는 염불 따라 외면

내 눈가엔 끊임없이 빗소리는 내리고

유월의 창문 밖에는

상수리나무 초록빛 목청을 밟고

이승의 사투리로 휘파람새는 웁니다.

다시 향불을 살라

서역하늘 무성한 구름을 지우고

삼베 옷, 상장 태우며

두 손 모아 비느니

우연에 지워지는 저 사바의 마을

마당 앞 살구나무에 봄이 오면

환히 불 밝히는 살구꽃으로 오소서.












posted by 청라
 

하관(下官)

― 思母 十題 4

향을 피운다. 봄 하늘에

가는 실처럼 향연이 오른다.

향불이 꺼지면 이제 우리는

눈물을 묻어야 하리.


한 사람의 일생을 담아놓기엔

너무나 좁은

직사각형의 공간으로

관이 내린다

천   천   이


관이 내려지면서 뚜껑이 열리면

일평생 마련하신

삼베 수의 한 벌

허망한 빈 몸…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막막한 저승길 밝혀줄

탑다라니 한 장

흙을 덮으며

가슴앓이를 묻는다.

자식 둘 앞서 보낸 눈물의 생애를 묻고

맨발로 헤쳐 온 아픈 역사를 묻고

어머니의 향기를 묻는다.


한 사람 비운 빈자리엔 진달래꽃

심술로 고와

두견새 울음으로 봄이 녹는데


손 흔들며 손 흔들며

영 떠나보내려 해도

스쳐 가는 바람, 흔들리는 나뭇가지에도

어머님 눈물은 있네.

posted by 청라

산철쭉

 

산철쭉

산철쭉

가지마다

점점이

밝혀든 꽃등


봄바람에 묻어나는

진분홍 옛 이야기


고향을 잊지 말라는 어머님의 말씀이다.

posted by 청라

백목련

 

백목련

옥양목 치마 저고리

장롱 속에 묻어 놓고


겨우내

설레임을

가꿔오신 어머님


봄 오자

곱게 차려입고

봄나들이 나오셨네.

posted by 청라
 

고무신

― 思母 十題 3

화톳불 연기가

밤 새 울음소리 지우고 있다.


사잣밥상 아래

백목련 꽃 두어 이파리

어머님이 벗어 던진 이승의 신발


까맣게 지워진 세상이라

더욱 하이얀

한 켤레

적막을 신고

나의 유년시절은 떠나고 있다.


벗겨도 벗겨도 추억의 껍질 남아 있는

고향집 뜰에

오늘도 내 어린 날 살구꽃은 지는데


어느새 이만큼 걸어와 뒤돌아보는

지명(知命)의 내 머리칼에

거뭇거뭇 남아 있는 어리광 싣고 가려고

밤 새 울음소리 지워진 세상

어머님 고무신

더욱 하얗게 빛나고 있다

posted by 청라
 

운상(運喪)

― 思母 十題 2

잔이 내려졌다. 발인제도 끝났다.

상두꾼들은 꽃상여를 메고

마당을 한 바퀴 비잉 돈다.

다시는 못 돌아올 문을 나서면

상두꾼들 노래 소리에 곡소리는 묻히고

철없는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젯상 앞의 떡들을 들고 뛰는구나.

뜰 앞의 살구나무는 몇 잎

꽃잎을 뿌려 손을 흔들고

한 발짝 한 발짝씩 떠나가는 길

다시 못 올 청산인데

사람들은 호상(好喪)이라고 웃고 떠들며

인생의 또 한 고개를 넘는다.

오르막길 오를 때마다 상여는 멈춰 서고

상주들은 너도나도 돈을 거는데

어머님은 빈 손 맨발로 떠나

저승의 어느 주막에서 울고 있을까.

눈물로 씻고 보면 생전에 걷던

초록빛 발자국 점점이 찍힌 길

요령잡이 만가소리 점점 빨라져

조객들 어깨춤 들썩이는 사이로

어머님 흔적 지우는 연기

내 가슴으로만 내 가슴으로만 따라 오는데

두견새 울음소리로 핏물 젖은 곡을 할꺼나

푸른 봄 하늘에

눈물을 말릴꺼나.

posted by 청라

임종 ― 思母 十題 1

 

임종

                               ― 思母 十題 1


까마귀 울음소리가 물고 가는

어머님 이름

간절한 눈물로 피워낸

진달래꽃 수만 송이로도

어머님 발걸음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다 놓고 떠나시는 어머님 빈 손

육 남매를 묶어 놓던

분홍빛 질긴 끈 위에

우리는 하나씩 손을 얹어 드렸습니다.

철성산 산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어스름 따라

남가섭암 목탁 소리가 내려옵니다.

우리를 위해 부처님께 비시던 입술은 굳어

아무 말씀도 하실 수 없고

이제 어머님을 위해 내가 두 손을 모아봅니다.

시냇물들은 어제처럼

제 몸들을 부딪쳐 거품을 피워내고

어머님을 위해 서둘러 달려온 봄은

버들강아지 가지마다

몸부림치며 불꽃 피우는데

어머님 이름이 지워지자

고향 빛깔은

막막한 어둠으로 변했습니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