訟詩 -꽃으로 피소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9. 3. 15:44

訟詩

 

꽃으로 피소서

-이경주 교장선생님 청년을 축하하며

 

엄 기 창

 

산처럼 무거워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러워

쉽게 노하지 않는 사람

 

四十年 가까이 걸어오신 삶의 길에

인연의 줄을 접으며

빛나는 발자취 돌아보는 뒷모습에

은은한 솔향기가 풍겨옵니다

 

포연으로 일그러진 전쟁 통에 태어나

황량한 고국의 뜰을 일구어

묘목을 심고 정성스레 가꾸기에

당신의 손길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나무들은 건강히 자라

무성한 숲을 이루고

당신이 가꾸신 이 조국은

세계 속에 우뚝 솟은 거목이 되었습니다.

 

긴 항해 끝에 닻을 내리고

이제는 돌아서야 할 시간

멈추어서 더욱 빛나는 당신을 향해 비오니

새로운 걸음걸음 꽃으로 피소서.

 

 

posted by 청라

풀의 나라

시/제3시집-춤바위 2013. 8. 8. 08:54

풀의 나라

 

그 섬에 가 보니

거기도 온통 풀밭이었다.

풀 중에 뽑힌 것도

역시 잡초였다.

 

풀들의 시선은

온통 아래쪽으로 기울어 있다.

내 땅 한 뼘 더 늘리려고

촉수를 뻗어 어깨 싸움에만 골몰해 있다.

 

나무는 싹 틀 때부터

하늘 향해 뻗고 있는데

하늘 향한 용틀임은 기억에도 없는

저 풀들의 가난한 꿈

 

미래를 향한 이상도 없고

과거의 썩은 것들만 파먹고 사는

풀의 나라에 가서 나는

부끄럼 모르는 풀밭에

 

눈물 한 방울을 떨구어 주었다.

 

2013. 8. 8

posted by 청라

<해설>

 

절제와 응축으로 피어난 생명 탄생의 신비

                                           엄 기 창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노래를 알았다.

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아침 序曲」 전문

 

  위의 시 「아침 序曲」은 1974년 월간「時文學」지에서 주최한 ‘전국 대학생 백일장’에 장원으로 선정되어 『時文學』지에 초회 추천을 받은 시이다. 내가 붓을 꺾지 않고 지금까지 시의 길을 꾸준히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침 序曲」의 장원 입상이 그 때 마침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고 있던 내 자신에게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아침 序曲」에서 용기를 얻어 이 날까지 탈선하지 않고 꾸준히 시를 썼고, 부족하지만 두 권의 시집도 상재하였다. 이 시 이후에 태어난 시들은 이 시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이 시의 자식들이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당신의 대표 시가 무엇이오?” 하고 물을 때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침 序曲」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태화산의 새벽 숲은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맑고 신선하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 나는 공주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마곡사에서 운영하던 고등공민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선생님이 사시던 토굴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숲길을 거닐면서 태화산의 새벽 숲에 매료돼 버렸다. 햇살이 번지기 전의 차갑도록 청신한 공기와 막 잠에서 깨어 “찌르르 찌르르” 울고 있는 나지막한 새들의 울음소리. 어둠 속에 잠들었던 새 생명이 여명 앞에 실체를 드러내어 약동하는 생명 탄생의 신비를 나 혼자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 숲에서 벌어지는 생명 탄생의 모습을 소재로 세상에서 가장 참신한 시를 쓰고 싶었다. 이 세상 그 어느 생명보다 은밀하게 태어나 새벽 숲에 햇살처럼 번져가는 생명을……. 공주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수요문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시를 보는 안목과 시를 쓰는 실력도 많이 성장하였다. 그 때 나는 드디어 오래 간직했던 기억의 창고에서 그 때 그 마곡사의 새벽 숲에서 느꼈던 생명 탄생을 훔쳐보던 감흥을 시로 형상화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조재훈 선생님은 내 첫 시집 『서울의 천둥』작품 해설 「절제와 스밈의 시학」에서 “엄기창의 시는 언어의 경제 원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느 시, 어느 구절 하나 그냥 허술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길고 긴 이야기와 감추어진 여백의 의미를 가득 넘치게 거느리고 있다. 빠르게 스쳐 읽는 사람에게 그의 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적어도 작자가 힘쓴 몇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음미하듯 읽는다면 그의 시가 가진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조재훈 선생님의 평대로 이 시는 극도의 응축과 절제를 통해 만들어진 여백 속에 너무도 정갈하고 신선하여 신비하기까지 한 태화산 새벽 숲에 태동하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형상화한 시이다.

 

(가)비스듬히 鉉을 베고 누운 音들이

악보 속에서 걸어 나와

목젖을 두드렸다.

 

(나)우는 새의 목 너머로 훔쳐 본

아직 어느 악보 속에도 살지 않는

音의 침전,

 

(다)아침의 곧은 줄기 성센 가지를 골라

새는 노래를 뿌린다.

 

(라)번득이는 音들로 構想 짓는

몇 올 가락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다. 

 

  위의 (가)~(라)에서 ‘音’, ‘노래’ 등은 ‘생명’을 상징하는 시어들이다. (가)에서는 이미 만들어져 악보 속에 담겨있는 생명의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였고, (나)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의 목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생명, (다)에서는 가장 곧고 성센 가지를 골라 생명이 태동하는 모습을 (라)에서는 새로 태어난 생명들이 햇살처럼 선명하게 숲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더 이상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언어의 절제 속에 당시 심사위원장이셨던 김남조 선생님께서 “생경할 정도로 참신한 이미지와 그를 받쳐 주는 탄탄한 구조가 너무 아름다워 단시임에도 불구하고 장원으로 선정하였다”는 말씀대로 생명이 탄생하는 숨막히는 순간을 투명하게 그려내었다.

  서정주 선생님은 생명 탄생의 신비를 지켜보는 감흥을 그의 시 「국화옆에서」에서 “노오란 네 꽃잎이 필랴고/ 간밤 무서리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라고 노래하셨고, 이호우 선생님은 그의 시조 「개화」에서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라고 노래하셨다. 고요한 새벽 숲, 새의 목 너머에 숨어있던 새로운 생명이 소리로 튀어나와 햇살처럼 평화롭게 번져가는 모습을 보는 감흥을 나는 너무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일까!

  나는 아파트로 들어오는 입구의 벽에 이 시를 시화로 만들어 걸어놓고 외출했다 들어올 때마다 읊조리며 기도한다. 어린 시절 태화산 새벽 숲에서 보았던 새 생명의 태동과 그로 인한 평화가 이 시로 인해 우리 집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평화를 주기를.

posted by 청라

<송시>

향 맑은 옥돌 같은 당신을 보내며

            -오명성 교장선생님 정년퇴임을 축하하며

 

당신 곁에 서 있으면

산골짜기 굽이쳐 돌아 폭풍처럼 달려가는

힘 센 산골 물소리 들려옵니다.

아이들 위해 가야 할 길을 갈 때에는

험한 산봉우리 완강한 바위도 뛰어넘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당신은

의지가 강한 산골 물입니다.

 

당신 곁에 서 있으면

평야를 유유히 흘러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가슴 넓은 강물소리 들려옵니다.

같이 걷는 사람들과 손잡고 갈 때에는

눈보라 칼바람에도 어깨동무를 풀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품어 안고 함께 가는

당신은

포용력이 강한 강물입니다.

 

한평생 달려온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보면

민족의 어두운 새벽에 촛불을 들고

한 올 씩 꺼져가는 불빛을 키워

당신의 걸음 따라 아침이 오고

힘없던 조국은

세계를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습니다.

 

당신의 흐름은 이제

바다에 닿았습니다.

당신이 담아온 풀 향기와 도시를 흐르며 거느린

수많은 이야기들도

이제는 닻을 내렸습니다.

향 맑은 옥돌 같은 당신을 보내며

아쉽게 손을 흔들며

우리도 당신을 닮은 향내 품은 물로 살겠습니다.

 

posted by 청라

개나리꽃

동요 2013. 5. 9. 07:39

개나리꽃

 

유리창에 매어달린 아이들 얼굴처럼

까르르 피어나는 해맑은 웃음처럼

개나리 꽃가지에 터지는 저 함성을

할머니 윤기 잃은 가슴에 심어주고 싶어요.

 

뒷마당에 숨겨놓은 병아리 솜털처럼

삐약삐약 울려오는 햇살 같은 울음처럼

개나리꽃 꽃가지에 밝혀지는 저 등불을

할아버지 메마른 가슴에 달아주고 싶어요.

posted by 청라

민들레 편지

시/제3시집-춤바위 2013. 4. 30. 08:44

민들레 편지

 

현충원에 가서 잡초를 뽑다가

어느 병사의 무덤에서

날아오르는 민들레 홀씨를 보았다. 

바람도 없는데

무덤 속 간절한 절규가 솟아올라

북녘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따뜻한 사랑 한 포기

싹 틔울 수 없는 툰드라의 언 땅에서

흰옷 입은 사람들의 소망이 싹틀 수 있도록 

반백 년 넘게 땅 속 깊이 묻어

발효시킨

저 병사의 피 맺힌 염원과  

‘함경도’

소리만 들어도 눈물 흘리시던

내 할아버지의 슬픔,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에

담아 보낸다.

내년 민들레꽃 피기 전까지 

굳게 동여맨 민족의

허리띠를 풀자.

 

2013. 4. 30

posted by 청라

까치

시조 2013. 4. 16. 08:03

까치

 

몸 하나 누일만큼

알 하나 품을만큼

미루나무 꼭대기에

오막살이 지어놓고

“깍깍깍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저 까치.

 

백 번을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소리

바람 숭숭 뜷린 집에

밤 하늘 별이 새도

“깍깍깍 나도 사랑해”

깃을 펴는 저 까치.

 

2013. 4. 16

posted by 청라

외돌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3. 24. 08:36

외돌개

               -제주 詩抄2

 

누군가 환청처럼 부르는

소리를 따라

서귀포 칠십 리 해안선 길을 걷다가

 

기다림으로

하반신이 닳아버린

외돌개, 그 처절한 외로움을 만나다.

 

삶이 때로는

슬픈 무늬로 아롱질 때도 있지만

동터오는 아침 햇살로 반짝 갤 때도 있으련만

 

외돌개야!

빠지다 만 몇 올 머리카락 신열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주름진 피부 골골마다

소금기로 엉겨 녹지 않는

진한 통증을 안고

 

먼 바다를 응시하는 눈망울엔

아직도 무지개처럼 영롱한

꿈이 어렸다.

 

외로움을 보석처럼 깎고 다듬어

메마른 가슴에

해당화 한 송이 피울 날을 기다리며

 

갈매기 소리에도 귀를 막고

혼신의 힘을 다해 파도 소리로 부서지는

할머니 옆에

 

나도, 문득

자리를 펴고

하나의 돌이 되고 싶었다.

 

2013. 3. 24

 

 

 

 

posted by 청라

일출봉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3. 23. 08:15

일출봉에서

           - 제주 詩抄1

 

가슴에 담아 가면 됐지

사진은 찍어 무엇 하나

 

성산포는 느긋하게

누워있고

일출봉은 할 말을 참고 있다.

 

파도 소리는 무슨 색깔일까

술에 취하여 바다를 보면

속앓이로 끊임없이 뒤척이는

바다의 마음이 투명하게 보인다.

 

아이들 따라

일출봉에 왔다가

나는 바다와 속이 틔어 친구가 되었다.

 

2013. 3. 23

 

 

posted by 청라

산나리꽃

작시 가곡 2013. 3. 15. 10:45

 

이 노래는 '정 태준'님이 작곡하신 노래입니다.

산 속에 혼자 피어 외로움 속에서도 외로움을 행복으로 삼아 살아가는 산나리꽃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