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같은 삶

               -정문경 시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모란꽃 부스스 피어나는

오월인가요,

꿈결인 듯 그대 訃音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따라가는 뻐꾸기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칠갑산 넘어가더니

갑자기 허허로운

빈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대 있는 세상에서도

아이들 울음소린 들리는가요? 

방실방실 웃는 아이 모습 어이 놓고서

그리 서둘러 이승 떠났는가요?

 

그대 신다 버린 낮달이 한 짝

서편 하늘가에

서럽게 떠 있습니다.

 

그대 비운 빈자리에

오늘도 흐드러지게 꽃은 피고

세상은 어제처럼 무심히 돌아가지만

 

짧아서 더욱 화려하게 타올랐던

삶의 불꽃

우리 마음 갈피 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겁니다.

 

 

posted by 청라

가시

시/제3시집-춤바위 2013. 3. 3. 21:30

가시

 

숨기다가 숨기다가

무심코 튀어나온

아내의 볼멘소리처럼

 

수줍게 고갤 내민 탱자나무 새순에

저 부드럽고 뾰족한

가시

하나

 

2012. 3. 3

posted by 청라

사랑과 믿음

시조 2013. 3. 1. 10:22

사랑과 믿음

 

아이들 혼인날 아침 마음 씻고 비는 것은

사랑의 날실과 믿음의 씨실을 엮어

결 고운 비단결 같이 삶을 펼쳐 가라는 것,

 

안 보면 보고 싶고 보아도 또 보고 싶게

마음의 꽃술 열어 사랑의 꿀 채우거라

큰 그늘 드리우지 않게 눈을 떼지 말거라

 

몇 억 겁을 헤매다가 청홍실로 묶였는고!

작은 의심 키우다가 인연의 줄 끊지 말고

믿음의 울타리 안에 화락(和樂)한 삶 이루기를……

 

손잡고 걷는 길에 고개 어찌 없겠는가

남편이 발을 삐면 내 살처럼 아파하며

아내가 넘어지면 등에 업고 가라는 것.

 

201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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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시/제3시집-춤바위 2013. 2. 19. 21:58

부부

 

나는 언제나

마음의 반을 접어서

아내의 마음 갈피에

끼워놓고 산다.

 

더듬이처럼 사랑의 촉수를 뻗어

심층 깊은 곳에 숨겨진

한숨의 솜털마저 탐지해 내고

아내의 겨울을 지운다.

 

어깨동무하고 걸어오면서

아내가 발 틀리면

내가 발을 맞추고

내가 넘어지면 아내가 일으켜주고

 

천둥 한 번 울지 않은

우리들의 서른다섯 해

사랑하고 살기만도 부족한 삶에

미워할 새가 어디 있으랴.

 

2013. 2. 19

 

 

posted by 청라

나박김치

시조 2013. 2. 10. 22:13

나박김치 

 

설날 아침 떡국 먹다 나박김치 국물에

엄마와 함께 보던 노을빛이 떠올라서

한 수저 남겨놓고서 눈에 이슬 내려라.

 

 

2013. 2. 10

 

posted by 청라

장다리골

시조 2013. 1. 27. 09:48

장다리골

 

머리채 긴 솔바람이

골목길 쓸고 간 후

집집 텃밭마다

장다리꽃 등 밝히다.

꾀꼬리

목소리 빛으로

눈부시던 그 꽃밭…….

 

지금은 장다리골

봄이 와도 꽃은 없고

꾀꼬리 꽃 부르던

목소리도 사라지고

고샅길

꼬불꼬불 돌아

경운기만 가고 있네.

 

 

2013. 1. 26

 

posted by 청라

매미 소리

시조 2013. 1. 20. 09:10

매미 소리

  사탕 하나 입에 물고 예닐곱 개는 양 손에 갈라 쥐고

  휘파람 부을면서 목 빳빳이 세우고 갈 지자 걸음으로 천천히 고샅길 맴돌 적에 창현이, 천용이, 희수, 윤현이, 순옥이, 영숙이, 희순이, 희원이, 종환이, 동현이, 현자, 희익이, 학근이, 종순이 등등 일 개 소대 침 질질 흘리면서 비칠비칠 따라오며 기죽은 눈길로 내 양손만 뚫어질 듯 바라볼 때

  내 마음 깊은 울안에 천둥치듯 일어서던 아! 저 백만 마리 매미 소리.

  1013.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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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虛齋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12. 12. 29. 09:49

滿虛齋에서

 

옷깃에 묻어 온 속세의

근심 몇 올이

아침 햇살에 안개처럼 풀리고 

힘들여 벗지 않아도

때처럼 벗겨진 慾心 말갛게 씻겨

풀꽃으로 피어나는 滿虛齋에서 보면 

저기 보이지 않는

虛空

무슨 울타리라도 있는 것일까! 

마을에서 산 따라 조금 들어왔을 뿐인데

모든 소리들이 걸러지고 닦여져서

딴 세상 같은 고요……. 

秀澗橋를 건너다

문득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무성산은

산의 커다란 마음을 조금씩 녹여

滿虛瀑으로 흘려보내서 

천둥 같은 소리로 노래할 때나

가는 한숨으로

잦아들 때나 

인생의

차고 비움도 滿虛齋에 서면

폭포 소리에 녹아

물안개로 떠돌아라.

 

2012. 12. 29

 

滿虛齋(만허재)-충남 공주시 사곡면 회학리에 있는 엄기환 화백 화실

 

 

posted by 청라

우수憂愁

시조 2012. 12. 1. 11:39

우수憂愁 

 

그대에게 다가가는 길은 끊어지고

오늘따라 어둠은 장막처럼 가로막아

 

창문에

비친 불빛만

바라보며 서 있다.

posted by 청라

따뜻한 가을

시/제3시집-춤바위 2012. 11. 6. 14:03

따뜻한 가을

 

 

아파트 안 도로를 차로 달리다가

다리 다친 비둘기 가족을 만나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선다.

 

경적을 울리면

아기 비둘기 놀랄까봐…….

 

산을 오르다가

허리 구부러져 누운 들국화를 보면

발을 멈추고 튼튼한 이웃에 기대어 준다.

 

가벼운 바람에도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잠시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내 따스한 마음 머물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조그마한 나의 온기가

다리가 되고, 날개가 되고

숨결이 되어줄 사람 얼마나 많은가.

 

단풍잎 붉은 기운이

핏줄을 타고 들어온다.

바람은 차도 가을은 따뜻하다.

 

2012, 10, 6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