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一株門에 기대어서

 

 

내 몸의 반은

사바에 걸치고

나머지 반쪽은

불계佛界에 들여놓고

 

일주문一株門에 기대어서

목탁소리 듣다가 보면

꽃이 지는 의미를 알 듯도 하다.

 

속세의 짐을 문 앞에 내려놓고

향내 따라 들어오라고

풍경소리 마중 왔지만

 

비우고 비워도

투명한 바람이 될 수 없는

업연業緣의 질긴 끈이여!

 

별이 내릴 때까지 흔들리다가

나는 양쪽으로 발 걸친

일주문 기둥이 되어버렸다.

 

2015. 8. 15

<동서문학>2015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모란

시조 2015. 8. 11. 15:12

모란

 

 

모란꽃 모든 귀들은

법당 쪽으로만 기울어 있다.

 

불경소릴 들으려고

깃 세워 퍼덕이던

 

一念이 영글어 터진

저 간절한 날갯짓

posted by 청라

原點에서

原點에서

 

 

한 알의 죽음 곁에서

푸른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

한 알의

또 다른 비둘기가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비둘기의 날개가 햇살의 鍵盤을 두드리며

높은 옥타브로 치솟던 하늘 밑에서

하나의 알은

처절한 침묵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과 끝이

몽롱한 안개처럼 누워있는

원점에서의 해후

빛나는 履歷들도 어둠이 된 의 바다에서

부리를 닦는다.

입동의 하늘 끝 눈발이 내리고…….

posted by 청라

석불

석불

 

 

머리가 없다고

자비慈悲마저 떠난 것은 아니다.


반쪽만 남은 몸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합장合掌을 받고 있으니

육신의 모습은 그에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다.

 

떨어져 나간 어깨

움푹 파인 가슴에도

떼어 줄 것 아직 남아있어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온 몸 다 공양供養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한 조각씩 부스러질 뿐이다.

 

2015. 7. 23

<대전예술> 2015년 12월호

<불교공뉴스> 201616일자

posted by 청라

눈길

수필/서정 수필 2015. 7. 23. 16:04

눈길

 

 

  이른 매화꽃이 핀 지도 한참 지났는데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개화를 준비하던 꽃가지마다 탐스럽게 눈꽃을 매달았다. 어디를 바라봐도 온통 정결한 흰 색이다. 아버지 기일이라 연미산 고개를 오르면서 문득 어떤 눈길이 떠올랐다.

  간경화로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진 아버지는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고 우기셔서 억지로 퇴원을 하셨다. 공주에서 택시로 집엘 가던 그 때도 눈이 많이 내렸었다.

  “다시 이 길을 또 올지 모르겠네.”

  애잔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그 때의 그 말씀이 이 길의 마지막이셨다. 그 후로 아버지는 이 길을 다시 오지 못하셨다.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시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담아두시려고 사방을 둘러보시던 그 때의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추억이 얽힌 눈길이라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던가,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 전날이 되었는데 눈이 엄청 내렸다. “천산 조비절이요(千山鳥飛絶)이요 만경인종멸(萬徑人蹤滅)”이라 했던 유종원의 강설(降雪)이 떠오르는 날씨였다. 교통이 모두 두절되어서 오십 리가 넘는 공주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하루 결석하고 내일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끝까지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께서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서셨다. 나보다 서른네 살이 많으셨으니 당시에 쉰세 살이셨다. 큰 병이라도 나시면 큰일이기에 내일 가겠다고 물러섰지만 사나이가 한 번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가야한다고 앞장서셨다.

  회재고개를 올라가는데 눈보라 칼바람이 몰아쳤다. 코도 시리고 손가락, 발가락 끝이 모두 아리고 아팠다. 백분의 일도 못 왔는데 그만 들어가시라고 간청해도 대답도 않으시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아버지의 등엔 내가 먹을 쌀 한 말이 메어져 있었다.

  우성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나는 비탈진 도로에서 미끄러져 같이 붙잡고 넘어졌다. 눈 밑엔 자갈이 깔려서 무릎이 몹시 아팠다. 아버지도 아프셨겠지만 내 옷을 털어주시고 겉옷을 벗어 내 등에 입혀주셨다. 나는 눈물이 났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자식들에겐 엄격한 아버지였다. 노름을 좋아해서 어머니를 고생시킨다고 늘 원망하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극한사항에 도달하자 자식을 가진 아버지는 결국 아버지였다.

  전막 가까이서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자장면을 먹었다. 무척 시장하실 텐데도 몇 젓가락 내 그릇에 덜어놓으셨다. 나는 내 눈에도 눈물이 많음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걸핏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걸었던 눈길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끝없이 나에게 묻는다. 눈보라 칼바람 속에서 오십 리 넘는 눈길을 아들을 위해 선뜻 따라나설 수 있겠느냐고.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지극한 사랑을 베풀 수 있겠느냐고.


<한밭수필> 제7호(2015년)

posted by 청라

오륙도

오륙도

 

 

바람이 몹시 불어서

바다는 굳게 동여맸던

마음의 옷고름을 풀었다.

바다의 분노가

하얀 포말로 일어선다.

나는 흔들리는 바다에 창을 달고

저 지독한 심술이 어디로부터 피어나는지

은밀한 비밀을 엿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불들이 모두 꺼져가고

달조차 작은 실오리만한 눈빛도

내비치지 못하는 밤

자비의 여신들도 바다의 횡포에 눌려

날개 접고 모두 돌아누웠는데

오륙도 혼자

밤새도록 파도의 채찍을 맞고 있다.

종아리마다

채찍자국 화인처럼 찍힌다.

폭주하는 바다를 달래려고 묵묵히 형벌을 받고 있는

오륙도는

바다의 아버지다


<동서문학>2015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호박

시조 2015. 7. 16. 19:15

호박



비탈밭 마른 덩굴에

호박 혼자 늙어간다.


씨 뿌린 할마시는

오는 걸 잊었는가.


마을로 내려가는 길

망초꽃만 무성하다.


2015. 7. 16

posted by 청라

산나리꽃

산나리꽃



사랑은

단 한 송이 꽃으로만 피어나야 한다.

 

마디마다 흔들림의

자잘한 개화開花를 참아내고

 

혼신의 힘으로 뽑아 올려

대궁 끝에 터뜨린

저 간절한 고백告白 한 송이.

2015. 7. 12



posted by 청라

서낭나무

서낭나무

 

 

꽹과리 소리도 멈췄다.

달그림자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속 빈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있을 뿐이다.

무나물에 밥 한 그릇도 받지 못하고

낡은 오색 천들만 힘겹게 꿈틀거릴 뿐.

아랫마을 고샅마다 집들이 비고

철마다 빌어주던 사람들의

믿음 다 떠나가고

길을 넓히려면 베어버려야 한다는

도낏날 번득이는 소리에 얼이 빠져서

삼신바위 올라가는 솔숲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

후드득 몸을 떠는

신기(神氣) 잃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있을 뿐이다.

 

 

2015629

<문학저널>2015년 11월호

posted by 청라

<청라의 사색 채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충격적인 기사를 보았다. 어느 포털 사이트에 분노한 20... 멍청한 노인들 탓에 경로사상이 무너졌다.” 라는 제목 밑에 박근혜 선택적 복지라서 표를 줬다고??? 나잇살 처먹을 만큼 처먹고도 아직 덜 당했냐!” “그리 당하고도 젊은이들 앞길 가로막는 노인들... 그냥 일찍 뒈져라....” “20, 노인에게 절대 자리 양보하지 마!”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제도 폐지해 주세요.” “기초노령 연금 제도 폐지를 원합니다.” 등등의 노인들에 대한 갖은 험담이 실려 있었다. 할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버지 없고,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 없으니 이 글을 올린 젊은이나 그 밑에 서명한 사람들도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을 올리고 어찌 편안한 얼굴로 그 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문득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를 위해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볼품없이 허옇게 꺼진 연탄재이지만, 그래도 한때 불이 활활 타오를 때는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불덩이였던 존재, 자신의 몸을 다 태워 주위를 따뜻하게 데워줬던 연탄이 재로 변하여 구석에 쌓여져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모습이 마치 오늘날 노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자신 있게 하는 말이지만 이 시대의 노인들은 국가로부터 보상받고 젊은이들로부터 공경 받을 자격이 분명히 있다.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아오고 6.25 후의 참담했던 폐허를 이만큼 가꾸고 일궈온 것이 바로 이 시대의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어린 시절엔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었고, 나라는 필리핀, 아르헨티나 심지어는 북한보다도 경제적 여건이 형편없었다. 산은 헐벗을 대로 헐벗은 민둥산이었으며 전국의 도로망과 항만시설은 발전의 고동을 울릴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공장을 세우고, 길을 내었으며, 산에 나무를 심고, 새마을 운동에 동참하여 가옥 개선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노인들이다. 자식들과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 일할 곳만 있으면 청탁 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까마득히 우러러보던 유럽의 여러 나라보다도 잘 사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정치적 의견이 좀 다르다고 뒈지라고? 멍청한 노인들에게 자리 양보하지 말고 무임승차 제도 폐지해 달라고? 민주주의가 바로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들이 보완되고 협조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제도가 아니던가? 6.25를 겪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잔악함을 경험한 노인들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혁신의 기치 아래 다시 시작하는 진보보다 안정된 상태에서 점진적 발전을 추구하는 보수를 더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조국을 위해 아직 벽돌 한 장 올려놓은 적 없는 젊은이들은 온몸을 불태워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허연 재로 남아있는 연탄재 같은 노인들을 발로 찰 자격이 없다.

 

                             <금강일보> 2015년 6월 26일자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