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872건
글
산길
산길을 오르는 것은
산에 물들어가기 위해서다.
산으로 녹아들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몸으로 산이 되기 위해서다.
조그만 풀꽃으로 피면 어떠리.
초록빛으로 같이 물들다가
새들의 노래를 모아
자줏빛 내밀한 속말 한 송이로
서있으면 좋겠네.
솔잎 스쳐온 바람이
미움을 벗겨가고
꽃향기 다가와 욕심을 벗겨가고
말갛게 벗고 벗어
투명해져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어떠리.
내가 정상을 향해 산길을
끝없이 올라가는 것은
모든 것을 발아래 두려는 것이 아니다.
품어 안고 섬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2018. 9. 4
『문예운동』142호(2019년 여름호)
『현대문예』105호(2019년 7,8월호)
글
개화開花
꽃필 때
꽃빛에
아침노을 마실 왔다.
시작은 아름답게 해야 한다고….
2018. 8. 28
글
딸 바보
아빠랑 꽃밭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엔
내 얼굴만 가득가득 담겼네요.
아빠는
어떤 꽃보다
내가 제일 예쁘대요.
2018. 8. 11
글
가시연
예쁘고 고운 것은
눈만 흘겨도 쉬이 아파
물 저만큼 터를 잡고
완고한 장창처럼
가시를
세운 후에야
자줏빛 저 환한 웃음
2018. 8. 2
글
둘이 먹는 밥
달도 덩그렇게 혼자 떠 있을 때는
죽고 싶도록 외로운 것이다.
하나 둘씩 별이 눈뜨고
온 하늘이 별들의 속삭임으로
수런거릴 때
달의 미소가 더 따뜻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들끓는 식당 안에서
식판을 들고 와 혼자 밥을 먹을 때
아무도 앞자리에 마주앉는 이 없는 사람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손잡고 같이 걸을 때
삶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아내여!
아침저녁 식탁에
나는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다.
내 옆에서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당신의 호흡이 느껴질 때
나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낀다.
자식들이 하나씩 제 둥지로 흩어져가고
어깨동무했던 친구들
남처럼 서먹해졌을 때
돌아서지 않고 언제나 내 옆 자리를 지켜준
밥을 같이 먹어준 아내여!
세월의 눈금이 눈보라처럼 거셀지라도
당신의 미소는
늘 솔빛처럼 싱싱해야 한다.
내 옆 자리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어야 한다.
2018. 7. 27
『문학사랑』 2018년 가을호(125호)
글
아버지의 등
노송에 기대어 선다.
든든한 느낌이 아버지의 등 같다.
웃음 속에
늘 고뇌를 감추고
세상의 바람에 힘겨워하면서도
자식들에겐
산처럼 등을 맡기셨던 아버지.
그 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고
세월만큼 허약해진 등을 두드리면서
아이들이 힘들 때
믿음이 되고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서슴없이 기대오는
아버지의 등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의 추위에도 늘 푸르게
젊음을 벼려놓는 소나무처럼
눈물이 절반인 삶의 술잔 속에서도
해맑은 웃음의 알통을 세운다.
2018. 7. 20
『대전문학』81호(2018년 가을호)
글
여름날 오후
먹 오디 빛 호박잎 그늘
실잠자리 깊이 든 잠
빈 고샅 혼자 걷다
적막에 물릴 때 쯤
반쯤 연 사립 안에서
나직하게 암탉 소리
2018. 7. 5
글
계곡에서
물소리 그리다가
오수午睡에 잠긴 날에
풀 바람 꽃향기도
붓질 없이 숨결 틔워
도화지
맑은 여백엔
산이 풍덩 빠져 있다.
201`8. 5, 30
글
진짜 부부
송 교장이 오늘 따라 모임에 늦었다. 매 번 먼저 나와 기다리던 사람이 20분이나 늦게 나왔기에
“아니, 자네도 늙었나 보네. 이렇게 늦는 걸 보니”
하고 농을 건네니
“어머님 모시고 서울 병원에 다녀오느라 늦었네. 노인양반이 어찌나 끈질기던지.”
“무슨 소린가?”
“아버지 말이야. 평소엔 어머니를 잘도 구박하고, 싸우고 하던 양반이 의사선생이 괜찮다는데도 눈물을 글썽이며 별별 데 다 검사하라고 졸라서 늦었다네.”
송 교장 말을 듣다 보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 따듯한 것이 차올랐다. 그래 부부란 저래야 되는 것이다. 평소엔 삶의 재미로 자글자글 싸우다가도 어려움에 처하면 몸이 부서져라 달려들어 도와주는 것. 나의 반쪽이 고통스러우면 나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그 것을 해소하려 온 힘을 다하는 것.
잔잔한 감동에 취하다 보니 또 다른 어떤 부부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아프게 한다. K교장선생님은 내가 아주 존경하는 분이다. 늦게 상처를 한 후 자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0여 년 연하의 여자와 재혼을 했다. 새 부인이 교장선생님께 정말 잘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속의 아쉬움을 달래며 행복하게 살기를 빌었다.
그런데 그 분이 몹쓸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두 번이나 수술을 하고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데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새 아내의 태도가 돌변해 교장선생님을 구박한다는 것이다. 내 후배가 찾아갔을 때도 교장선생님이 병원에 다녀왔다고
“아니, 늙은이가 빨리 형이나 따라갈 것이지 병원에는 왜 가? 쓸 데 없이 돈만 없 애고.”
하면서 구박을 했다는 것이다. 죽을 것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1%의 소망이라도 갖고 싶은 것이 사람이 아닐까? 그 여자가 만일 조강지처糟糠之妻였다면 애들의 아버지요 평생의 반려자의 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내던지고 말았을까. 마음의 반을 접어 내 반쪽의 몸에 끼워놓고 아픔도 기쁨도 함께하는 것이 진짜 부부가 아닐까.
부부
나는 언제나
마음의 반을 접어서
아내의 마음 갈피에
끼워놓고 산다.
더듬이처럼 사랑의 촉수를 뻗어
심층 깊은 곳에 숨겨진
한숨의 솜털마저 탐지해 내고
아내의 겨울을 지운다.
어깨동무하고 걸어오면서
아내가 발 틀리면
내가 발을 맞추고
내가 넘어지면 아내가 일으켜주고
천둥 한 번 울지 않은
우리들의 서른다섯 해
사랑하고 살기만도 부족한 삶에
미워할 새가 어디 있으랴.
요즘 들어 아내가 자주 손이 저리다고 한다. 특히 잠을 잘 때 그 증상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아내가 신음 비슷한 소리를 하면 나는 잠결에도 자동적으로 아내의 팔을 주무른다. 목뼈에 협착증세가 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내의 손을 주물러주다 보니 옥처럼 곱기만 하던 손이 참 많이도 상하였다. 한복을 한다고 늘 바늘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주름살로 가득 앉은 손에 온통 바늘로 찔린 자국이다. 아내의 손끝은 성할 날이 없다. 손가락에 반창고가 흥부네 이불처럼 기워져 있다. 어느 날 그 손이 너무 안타까워서 이제 그만 집에서 쉬라고 했더니 일을 갖는 것이 몸은 고되어도 마음이 행복하단다. 등을 두드려주다 어깨를 만져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짝 야위었다. 더듬이 한 끝 아내의 몸속에 남겨두고 관심을 쏟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2018. 5. 26
글
튤립 사랑
아! 나는 튤립 꽃밭에서
한동안 숨을 멈추었네.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줄기를 위로만 곧게 세워
태양보다 더 뜨겁게 피워 올린
단 한 송이 튤립의 사랑
그래, 사랑은
한 송이만 피우면 되는 거야.
한 삶의 곧은 줄기엔
온 생애를 태워
진액만으로 빚어낸
오직 진실한 한 송이만 피우면 되는 거야.
절규絶叫보다 더 붉은
튤립의 꽃 바다에서
온 몸을 떨고 있었네.
2018. 5. 18
『충청문화예술』2019년 5월호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