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저녁

서해의 저녁

 

 

바다의

비린내를

노릇노릇 구워놓고

지는 해

노른자처럼

소주잔에 동동 띄워

마신다.

귀가 열린다.

물새들의 속삭임에

 

기우는

하루해를

잡아서 무엇 하리.

잔 부딪칠

사람 하나

있으면 그만이지

파도로

어둠 흔들어

잠 못 드는 밤바다

 

 

2019. 2. 17

posted by 청라

눈 오는 날

 

 

술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해야겠다.

 

따뜻한 정종 몇 잔 함께 마시고

어깨동무하고

대전의 밤거리를 걸어야겠다.

 

서먹했던 마음의 골목

밝게 비추는 불빛

수만의 벌떼처럼 잉잉대는 눈발

 

고희古稀의 문턱인데

명리名利를 다퉈 무엇 하리.

 

묵은 둥치일수록

단단하게 붙어있는

잔나비걸상버섯처럼

 

겨울 속에서도

그렇게 살아가자고

손을 내밀어야겠다.

 

 

2019, 2, 2

충청예술문화20193월호

posted by 청라

장날

동시 2019. 1. 24. 21:02

장날

 

 

엄마가 왔나보다.

사립문이 덜컹거린다.

펄쩍 뛰어 나가보면

지나가는 바람

 

사탕 한 봉진 사오시겠지.

살구나무 위 까치는

어림없다고 깍깍깍

 

미루나무처럼 목이 길어져 바라보는

산모롱이 길 

해가 이슥하도록

아지랑이만 아롱아롱

 

 

2019. 1. 24

 

posted by 청라

사막을 일구다

 

 

사랑편지를 전했더니

사막을 보내왔다.

그녀의 답신答信은 사막의 달빛처럼

무채색이다.

내 사랑 어디 씨앗 하나 싹틔울 곳 없어

도마뱀처럼 납작 엎드려

기어도 기어도 꽃은 피지 않는다.

선인장 가시에 긁힌 바람만 몇 올

모래언덕을 헤집다 스러질 뿐.

사랑이여!

작은 생명 하나 움트지 못할

불모의 땅에 뿌리를 내려보자.

깊이 숨어있는 초록의 숨결을 모아

천둥 번개를 불러오겠다.

바삭거리는 당신의 가슴에

몇 천 번이라도 비를 퍼붓겠다.

나는 사막을 일궈

사랑 한 그루 푸르게 크게 하겠다.

 

 

2019. 1. 8

충청예술문화92(201911월호)

 

posted by 청라

간송澗松 미술관에서

 

 

일본 땅 어디쯤 헤매고 있겠지

빼어난 어깨 위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온유한 가슴에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당신의 열정

민족혼이 지켜낸 천학매병千鶴梅甁

 

! 천 마리의 학들이 날아오른다.

비취빛 하늘

편편이 날리는 구름을 뚫고

 

종소리처럼 솔향기처럼

보아도 보아도 눈을 뗄 수 없는

가녀리고도 질긴 힘이여!

 

오롯한 한 가지만 심어도 좋을

좁은 입 속에

야월 한설夜月寒雪 피어난 한 송이 매화꽃 같은

당신의 정신만 꽂아놓고 싶었다.

 

 

2019. 1. 4

시문학20193월호

posted by 청라

비창悲愴

수필/서정 수필 2019. 1. 3. 06:05

비창悲愴

 

  일요일 아침 빈 배낭에 물병 하나 달랑 집어넣고, 단장 짚고 현충원 둘렛길을 걸었다. 산하山河는 뿌연 속진俗塵에 잠겨있다. 억새꽃 하얗게 덮인 길을 걷노라니 먼지에 덮인 세상이 마치 조화弔花처럼 생기가 없다. 내려다보는 계곡은 비석의 바다다. 나라를 위해 바친 목숨들이 비석으로 서있는 곳. 하고 싶은 간절한 말들도 꽃으로밖에 피울 수 없는 곳. 나는 망연히 바라보다 그 곳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병 ○○○의 묘. 무엇을 지키려다 어느 골짜기에 쓰러진 영혼인고? 죽음의 의미가 한없이 퇴색한 세태라서 질펀히 깔려있는 묘비들이 더욱 슬프다. 저들은 분명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을 것이다. 5월이면 철쭉꽃 영산홍꽃으로 밀어올리는 짙붉은 분노. 10월이면 억새꽃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하얀 한숨. 나는 주머니에서 오늘 처음 들고 온 새 손수건을 꺼내서 닦을 것 하나 없는 비문碑文을 닦고 또 닦아냈다. 문득 내 오랜 교직의 길에 아끼던 제자 장덕현 군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


비석을 닦는다.

마모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햇살 아래 드러난다.


묘지 앞에 심어진

시들지 않는 조화 몇 송이와

누군가 놓아두고 간 과일들에 배어있는

눈물의 흔적

 

흘러가는 세월 따라 흐르다 보면

모든 것은 삭아서 희미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파래지는

이끼 같은 슬픔도 여기 있다.

 

지하에 묻혀있는 영혼들의 외침이

한 송이씩 영산홍꽃을 피워 올리고,

향기처럼 떠도는

핏빛의 외로움

 

비석을 닦는다.

 

아픔의 찌꺼기 굳은살로 박혀있는

비문을 하나씩 짚어가며 닦다가 보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고

 

손끝으로 전해오는

그들의 이야기가 들릴 듯하다.


                                   장덕현-‘현충원에서

 

  제36회 통일문예제전에서 국회의장상을 수상했던 시다. 정말로 비문을 한 자 한 자 짚으며 닦다가 보니 마모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들려와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았다. 시들지 않은 조화 몇 송이와 누군가 놓아두고 간 과일들에 배어있는 눈물의 흔적이 겨울 찬바람 속에서도 파래서 시리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싱싱해지는 이끼 같은 슬픔, 과연 누구를 지키려고, 무엇을 위해 청춘의 꽃다운 목숨을 장렬하게 산화한 것일까.

  고귀한 목숨 값이 노란 리본에 가려져 한없이 작아진 요즈음, 폐기廢棄한 것도 없는데 전략적 미소 한 방에 저고리 바지 다 벗고 벌러덩 누워 모두 주려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모르고 박수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슬픔과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울컥 하는 감정 속에 차이콥스키의 6번 교향곡 비창悲愴 악상이 떠올랐다. 묘비墓碑의 바다가 주는 장중함과 우울함, 그리고 그 아래 영혼들이 느끼고 있을 패배감과 절망이 11월의 삭막한 하늘처럼 내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 명하니 앉아 하염없이 어깨를 떨 수밖에 없었다.

 

 

2019. 1. 3

posted by 청라

첫눈 오는 날

첫눈 오는 날

 

 

사색의 파편破片인가

시간의 대화對話인가

깜빡 든 잠 속에서

한 점으로 일어서서

온 세상

빗질하려고

부스대는 날갯짓

 

가고 오는 인연들이

정결하게 씻기는데

저 큰 붓질 한 번에

인간사 다 지워지고

깨다 만

꿈결 속에서

머언 산만 솟는다.

 

 

2018. 12. 27

posted by 청라

희생지犧牲枝

수필/서정 수필 2018. 12. 12. 10:27

희생지犧牲枝

 

 

  정원수로 가꾸기 위해 소나무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같은 값이면 원 둥치의 직경이 굵고 키 작은 소나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소나무 재배업자들은 소나무를 단기간에 굵게 키우고 싶어 한다.  줄기의 단면적은 그 줄기를 통해 왕래하는 물질들의 통과 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소나무를 빨리 굵게 키우기 위해서는 수관 부를 크게 키워야 한다. 수관 부를 빨리 키우려면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키워야 하는데, 원 둥치의 비대를 위해 당분간 키우고 있는 가지, 그 것이 바로 희생지犧牲枝이다.

  소나무가 완성목이 되기 전에 이 희생지犧牲枝는 반드시 잘려나갈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우거진 풀과 다른 나뭇가지들과 격렬한 전쟁을 치른다. 세상의 주역이 아님을 알면서도 불평 없이 원 둥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희생지犧牲枝. 그러기에 희생지犧牲枝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거룩하다.

  내게는 형님이 한 분 있었다. 6.25사변 중에 두 분의 형님이 돌아가시고 나와 열여섯 살 차이의 아버지 같은 맏형님만 집안을 지키고 계셨다. 더구나 아버지께서 사변 통에 북한군의 총탄에 부상당한 왼손을 잘 못 쓰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힘든 농사일은 형님께서 처리하셨다.

  내가 어릴 때의 우리나라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대부분의 농촌 청년들은 꿈을 찾아 도시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건너 마을 누구는 서울로 갔고, 장다리골 누구도 대전에서 큰 상점 점원으로 취직하여 출세를 했다는 소문이 부러웠던 그런 시절이었다. 형님의 꿈도 대도시에 나가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고 한 번 살아보는 거였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형님도 서울 큰 공장에 취직해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배움은 적었지만 원래 똑똑하고 성품이 좋았기에 주인에게 인정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갑자기 아버지께서 크게 편찮으셨기 때문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시골로 내려온 형님은 실망하지 않고 산밭을 일구시었다. 기구도 변변치 않아 괭이와 삽만으로 완만한 산의 경사면을 파고 또 파시었다. 늘 형님의 손바닥은 피가 맺혀 있었고, 허리는 나이에 비해 일찍 구부정해지셨다. 계단밭을 만든 후 복숭아 묘목을 심어 과수원을 만드셨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키우셨다. 그 때부터 우리 집안의 형편이 좀 피었다.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형님의 그 따뜻한 말씀을.

  내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주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몸부림칠 때였다. 집안 식구 다 굶겨 죽이려 한다고 부모님은 요지부동이셨다. 나는 밭을 매다가 호밋자루를 놓고 하염없이 울었다. 부모님은 따라 울면서도 그 것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때 형님이 말씀하셨다. 자기가 좀 더 고생하겠노라고.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느냐고

  형님의 희생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합격하여 소망이던 교직에의 꿈을 성취할 수 있었다. 내가 놓은 다리로 동생들도 쉽게 건너가서 한 사람은 육군 중령으로 퇴역하였고, 막내는 삼성중공업 부장으로 퇴임하였으며 조카들도 줄줄이 대학에 가서 마을에서 대학 졸업생이 가장 많은 집안이 되었다.

  형님은 집안의 희생지犧牲枝였다. 나를, 아우들을, 집안을 살찌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셨다. 형님이 없었으면 우리 집안의 덩치가 이만큼 건강하게 굵어질 수 있었을까. H.G. 보운은 양초는  자신을 소비해서 남을 밝게 해준다고 했으며, 톨스토이는 사랑이란 자기희생이며,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라 했다. 일찍 가셔서 보은할 길 없지만 희생지犧牲枝를 볼 때마다 형님 생각에 눈물이 난다.

 

 

2018. 12. 12

한밭수필12(2020)

posted by 청라

내 안의 박수

 

 

네가 쳐주는 박수보다

스스로 치는 박수가 아름답다.

 

내 안의 박수는 선인장 꽃 같아서

가시 끝에 매달려

더욱 빛이 나는 꽃

 

박수 한 번에

탑은 한 층 높아지고

박수 몇 번 치면 하늘 끝에 이른다.

 

스스로 치는 박수와

함께 달리다 보면

나는 태양의 아들

다시는 어둠으로 돌아갈 수 없다.

 

박수를 쳐라

마음으로 치는 박수

네가 쳐주는 박수보다

내 안의 박수가 더욱 붉다.

 

 

2018. 12. 8

posted by 청라

동무 소나무

 

 

나이테를 얼마나 헤집어야만

어머니 꾸중소리 거기 있을까

 

고희 가까운 날

문득 그 나이테 언저리 그리워져

고향 집엘 찾아갔다.

 

와락 껴안아도 말 한 마디 없는

웃음마저 아주 드문

무심한 놈

 

그래도 벼랑 끝에 서서

밀려오는 세상의 파도에 출렁거릴 때

제일 먼저 손을 잡아주던 친구

 

꾸중하는 사람 하나 없어

매운 꾸중 소리 더욱 그리운 날

솔가지 회초리 마음으로 끌어안으면

 

네 스스로 꾸짖으라고

부끄럽게 살지 말라고

한결같은 초록으로 말하고 있다.

 

 

2018. 12. 1

대전문학83(2019년 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