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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여름날 아침
풀잎 끝에 대롱거리는
이슬을 보다
나는 이슬에 갇혔었지.
하늘은 왜
투명한 목소리로 거기 박혀있을까
모란 꽃잎 위에 속살거리는
별들의 이야기 방울은
왜 수박 속처럼 맛이 있을까
구슬 빛에 홀려서
밤새도록 사연 깊게 울어대던
두견새 울음을 꿰어
영롱한 목걸이 하나 만들고 싶었지.
툭 하고 떨어져 꿈이 깨어질까봐
불어오는 실바람도
체로 치고 싶었지.
세상이 모두 신기하고
찬란하게 보이던
내 손자만한 그런 날 여름 아침에
『한국문학인』2016년 여름호
글
글
인동초忍冬草
세월이 허물고 간 산 밑 빈 집 담 자락에
인동초忍冬草 꼭지마다 주렁주렁 매단 적막
그리움 안으로 익어 하얀 꽃을 피웠다.
우측으로 감아 가면 정든 얼굴 떠오를까
대문 닫힌 긴 겨울을 초록으로 견딘 아픔
기다림 눈물로 삭아 노랗게 꽃잎 바랬다.
임자 없는 몸이라서 사연 더욱 만발했나
소쩍새 울음에도 반색하며 떨고있다.
벌 나비 담아가다 만 향기 자욱히 퍼진다.
2016. 3.22
글
꽃밭에서
눈물에서 실을 뽑아
가슴 울리는
그런 시의 베 한 자락 짜지 못할 지라도
꽃에 묻혀서
꽃으로 살았으면 좋겠네.
온 세상 한숨의 바다를
환한 꽃으로 불 질렀으면 좋겠네.
2016. 3. 18
글
목련 이제二題
자목련
서설瑞雪로 씻은
지등紙燈이다.
하늘 물살
불 밝히는
아직도 매운 세상
누군가의 바람인가
겨울 끝
시린 인심을
맑은 향기로 데운다.
백목련
옥양목 치마저고리
장롱 속에 묻어 놓고
겨우내
설렘을
가꿔 오신 어머님
봄 오자
곱게 차려입고
봄나들이 나오셨네.
글
키질의 법칙
가벼운 검불들 새처럼 날아가고
무거운 알곡들만 사락대며 남아있다.
어머니 키를 까불 때 변치 않는 법칙이다.
머리 헐고 코 흘리고 지독히 말 안 들어도
어머니 가슴 속에 우리 형젠 알곡이다.
키에서 벗어달 때면 불을 켜고 찾는다.
글
자목련
여리고 성긴 몸이 된바람에 숨 멎을까
짚으로 싸매주며 긴 겨울 잠 설쳤더니
아이의 첫 울음같이 빚어 켜든 달 한 등
글
길
평탄한 길을 걷다가도
가끔은 발이 꼬일 때가 있다.
누가 네 발목을 잡는가.
돌부리 하나 솟지 않은 맨땅
네 발을 거는 것은 네 스스로의 욕심
버려라
깃털처럼 가볍게
그리고 솟아올라라.
인생이 송두리째
넘어지기 전에
가끔은 길을 가다가
멈추어야 할 때가 있다.
2016. 2. 14
글
나이 유감遺憾
나는 버스를 탔을 때 자리가 없으면 젊은이들과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면 자리를 양보할 의사가 없었던 젊은이도 자리를 양보하게 되고, 또 자리를 양보할 처지가 못 되어 앉아있는 젊은이의 마음은 한없이 불편하고 불안해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냥 손잡이를 잡고 먼 산을 바라보거나 전면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접혀지는 도로를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혹시 비틀거려 젊은이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지 않도록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안정감 있게 서 있으려고 노력한다.
어느새 나도 자리를 양보할 나이에서 양보 받을 나이가 되었는가. 한두 번 사랑땜에 울고 나지도 않았는데 세월은 저만큼 가버리고 말았다. 내 나이도 가을이 되어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젊은이들을 괴롭히고 긴장시키는 내 나이에 대해 나는 유감이 많다.
며칠 전 시내에 볼일이 있어 버스를 탔다. 가장교를 건너는데 버스가 휘청 하여 내 자세가 좀 흔들렸나보다. 앞에 앉았던 50대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비슷한 사람도 없었다.
“저 말인가요? 고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나는 그 아주머니를 도로 자리에 앉혔다. 나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바로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휴대폰을 가지고 놀던 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뒤로 가버렸다. 앉으라는 말도 없었다. 제 딴엔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역전에서 내릴 때까지 뒤편에 서있는 그 학생을 보며 마음이 짠하고 불편했다. 염색은 세월을 속이는 것 같아 정말 싫지만 빨리 머리를 까맣게 물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언젠가 이 버스를 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도 80대 할아버지는 서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은 휴대폰만 가지고 놀았다. 할아버지가 힘겹게 서서 흔들거리는데도 그 학생은 본 척도 않고 놀이에만 열중했다. 할아버지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너는 애비 에미도 없냐?”
소리를 벼락같이 질렀다.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집중되었다. 학생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후닥닥 일어나서 뒤로 도망을 갔다. 그 할아버지는 제 자리인양 얼른 앉아버렸다. 나는 속으로 ‘뭐 저런 주책맞은 영감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이 많은 것은 자랑이 아니다. 젊은이가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긴 하지만 의무사항은 아니다. 내 손자가 버스 안에서 노인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은 있지만, 그러나 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만 편해지기 위해 학업에 지친 어린 학생들에게 억지로 자리 양보를 요구하는 그런 어른은 없어야겠다.
2016. 2. 8
글
청우정聽雨亭에서
솔 기둥에 기대어
빗소리를 듣는다.
칡넝쿨처럼 헝클어진
사념思念들이
빗질되어 말갛게 가라앉고
마곡천 물소리 속에 묻어온
독경讀經 소리에
한 송이씩 어두운 마음의 뜰을
밝히는 풀꽃
빗소리는
거울이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내 안의 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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