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點에서

原點에서

 

 

한 알의 죽음 곁에서

푸른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

한 알의

또 다른 비둘기가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비둘기의 날개가 햇살의 鍵盤을 두드리며

높은 옥타브로 치솟던 하늘 밑에서

하나의 알은

처절한 침묵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과 끝이

몽롱한 안개처럼 누워있는

원점에서의 해후

빛나는 履歷들도 어둠이 된 의 바다에서

부리를 닦는다.

입동의 하늘 끝 눈발이 내리고…….

posted by 청라

석불

석불

 

 

머리가 없다고

자비慈悲마저 떠난 것은 아니다.


반쪽만 남은 몸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합장合掌을 받고 있으니

육신의 모습은 그에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다.

 

떨어져 나간 어깨

움푹 파인 가슴에도

떼어 줄 것 아직 남아있어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온 몸 다 공양供養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한 조각씩 부스러질 뿐이다.

 

2015. 7. 23

<대전예술> 2015년 12월호

<불교공뉴스> 201616일자

posted by 청라

오륙도

오륙도

 

 

바람이 몹시 불어서

바다는 굳게 동여맸던

마음의 옷고름을 풀었다.

바다의 분노가

하얀 포말로 일어선다.

나는 흔들리는 바다에 창을 달고

저 지독한 심술이 어디로부터 피어나는지

은밀한 비밀을 엿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불들이 모두 꺼져가고

달조차 작은 실오리만한 눈빛도

내비치지 못하는 밤

자비의 여신들도 바다의 횡포에 눌려

날개 접고 모두 돌아누웠는데

오륙도 혼자

밤새도록 파도의 채찍을 맞고 있다.

종아리마다

채찍자국 화인처럼 찍힌다.

폭주하는 바다를 달래려고 묵묵히 형벌을 받고 있는

오륙도는

바다의 아버지다


<동서문학>2015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

산나리꽃

산나리꽃



사랑은

단 한 송이 꽃으로만 피어나야 한다.

 

마디마다 흔들림의

자잘한 개화開花를 참아내고

 

혼신의 힘으로 뽑아 올려

대궁 끝에 터뜨린

저 간절한 고백告白 한 송이.

2015. 7. 12



posted by 청라

서낭나무

서낭나무

 

 

꽹과리 소리도 멈췄다.

달그림자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속 빈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있을 뿐이다.

무나물에 밥 한 그릇도 받지 못하고

낡은 오색 천들만 힘겹게 꿈틀거릴 뿐.

아랫마을 고샅마다 집들이 비고

철마다 빌어주던 사람들의

믿음 다 떠나가고

길을 넓히려면 베어버려야 한다는

도낏날 번득이는 소리에 얼이 빠져서

삼신바위 올라가는 솔숲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

후드득 몸을 떠는

신기(神氣) 잃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있을 뿐이다.

 

 

2015629

<문학저널>2015년 11월호

posted by 청라

목척교 戀歌

목척교 戀歌

 

 

비오는 날 목척교에 나가보자.

슬픈 눈빛의 여인 하나 만날 것 같다.

소주 한 잔에 체온을 나눠 마시며

황톳물에 퍼다 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 젖은 사연

도란대는 물소리 듣다가보면

우리들의 슬픔은

바람에 스쳐가는 자잘한 이야기일 뿐.

보문산 소쩍새 소리 불러다가

그녀의 진회색 미소 위에

목거리처럼 걸어줬으면 좋겠다.

교각에 걸려있는 영롱한 불빛으로

마음 밭에 숨어있는 그늘을

말끔히 씻어줬으면 좋겠다.

봄이면 그네 뛰고 놀던 추억들이

물안개로 피어나는 목척교에 서면

대전천 물들은 서 있는데

우리들의 사랑은 어디론가 흘러간다.


 

2015612

<대전문학>69호(2015년 가을호)

<심상>2016년 6월호


 

posted by 청라

장미

장미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인가

서둘러 담 위로 기어 올라와

고갤 길게 내밀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저 불타는 갈망,

빈 골목길 회오리바람에 검불만 날려도

온몸 떨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다.

지난겨울 혼자 살던 할아버지 산으로 가고

대문 굳게 닫힌 울안 

빈 집 속의 적막으로 봉오리 부풀려

한 등 눈물로 켜든 저 짙붉은 외로움.

 

 

201562

대전문학2016년 여름호(72)

『심상2016년 6월호

『한국 시원』2018년 여름호(9호)

posted by 청라

스승의 날에

스승의 날에

 

 

철쭉꽃 모여

타오르는 산

가까이에서 보면

가끔은 벌레 먹은 꽃잎도 있네.

 

꽃잎 하나 태우려고

모두가 저 꽃밭에 불을 지르는가!

 

스승의 날에…….

 

2015. 5. 15

 

 

 

posted by 청라

보성 차밭에서

보성 차밭에서

 

                 엄 기 창

 

 

차나무 가지 끝마다

혼(魂)불 환하게 밝혀드는

저 연초록 손들을 보아라.

흰 눈을 이고 견딘 겨울의

뚝심을 모아

쌉싸래한 맛 속에 숨어있는

상큼한 차향(茶香)을 일으켜 세우나니

삼나무들도 어깨동무하고

눈짓 주고받으며

제암산(帝巖山) 정기를 퍼내어 끝없이 보내주고 있다.

득량만(得粮灣) 파도야,

대양(大洋)을 치달리던 폭풍의 노래들을

엽록소에 담아주려고

밤새도록 뻘밭을 기어오르느냐.

보성 차밭머리에서

성스러운 차 한 잎을 피우기 위해

정결한 머리로 기도하는 오선(五線)

선율에 취해

다시는 일상(日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2014. 4. 25

<문학사랑> 2015년 여름호(112호)

 

 

posted by 청라

歲寒圖에 사는 사내

歲寒圖에 사는 사내

 

 

그 집에는

울타리가 없다.

사방으로 열려서 신바람 난 바람이

울 밖 같은 울안을

한바탕 휘젓다 가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그 집 사내는

청청한 외로움을 가꾸기 위해

덩굴장미 한 그루 심지 않았다.

덩그렇게 세워 놓은 네그루의 소나무에도

새 한 마리 불러오지 않았다.

제대로 외로움을 즐기기 위해

평생을 마음 밭에 겨울만 들여놓고

뜰 밖을 둘러 친 울타리 대신

서릿발 같은 기상 온 몸으로 반짝이며

아예 방문을 지워버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

고개를 내미는 법이 없다.

 

2015. 4. 17

<대전문학>68호(2015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