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8. 08:20
 

서해


돌을 닦는다.

기름 속에 묻혀있던 이야기들이

햇살 아래 드러난다.


속 빈 조개껍데기와

검은 기름에 찌든 미역 속에 배어있는

어부의 눈물


세월이 갈수록 씻어지지 않는

바위 같은 슬픔이 여기 있다.


눈이 내려서 백장에 쌓여도

덮어도 덮어지지 않는

저 긴 해안선 위의 절망


기름 물로 목욕한 갈매기들은

날아오르다

지쳐서 쓰러지고


하얗게 배를 드러낸 물고기

물고기의 살밑으로 스며드는

저 짙은 어둠

 

파도는 오늘도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서해의 신음을 닦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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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라

弔 숭례문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6. 16:29
 

弔 숭례문


유세차

무자 2월 신사 삭

오, 애재라

불꽃 속에 사라진 숭례문이여


미명의 새벽 서울 하늘

붉게 물들인 화광이

사람들의 새벽 꿈밭을 불태울 무렵


나는 들었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가장 소중한 것이 무너지는 소리를


숭례문이여!

육백년 넘게 우리를 지켜온

너는 역사의 증인.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비껴서 갔다네.

일본놈도 떼놈도

고갤 돌리고 갔다네.


남들도 우러러 피해간

성스러운 가슴에

우리 스스로 불을 놓았구나.

민족의 얼을 살라 버렸구나.


이제 다시 옛모습 다시 세운다 해도

수많은 세월 지켜본 네 기억

사라진 역사는 어이할이거나.


posted by 청라

겨레의 스승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4. 21:53
 

<訟詩>


    겨레의 스승


              김선회 교장선생님의 전년퇴임을 축하하며

                                             엄 기 창



당신은

산바람에 씻기고 씻긴

소나무처럼

올곧은 기개를 지닌 사람


물처럼 부드럽게

바른 곳으로만 흘러 흘러

제자들의 마음도

맑게 씻겨준 사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빛을 세워

세상을 시나브로 밝혀가면서


묵묵히 걸어온 당신의 발걸음은

제자들을 위한 눈물로

사십년을 넘겼습니다.


돌아보면

바람 불고 눈보라치는 고개를 넘어

당신의 삶의 발자국 점점이 찍힌 길


질기디 질긴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당신은 참으로 큰

겨레의 스승입니다.

posted by 청라

난꽃과 아내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1. 14:29
 

난꽃과 아내


난향(蘭香)은

있는 듯 없는 듯 그윽하다.

창틀 위에 난초꽃 한 송이만 피어있어도

온 집안 비었어도 가득하다.


아내는

있는 듯 없는 듯 따뜻하다.

주방 도마에 칼 소리만 또각거려도

온 집안 비었어도 가득하다.

posted by 청라

원가계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2. 08:38
 

   원가계



   봉우리마다 구름이 너울처럼

   산의 얼굴을 가려주고

   골짜기마다 안개는 나삼(羅衫)이 되어

   산의 알몸을 가려주네.


   기봉(奇峰)은 날아서

   학이 되고

   폭포(瀑布)는 떨어져

   은하수가 되네.


   옛날에 신선도(神仙圖)를 보고

   관념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더니

   원가계에 와서 보니

   그림이 오히려 산수를 다 그리지 못하였네.


   폭포 소리 녹아

   솔향 더욱 그윽한 곳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면


   속진(俗塵)이 말갛게 씻겨

   나도 신선이 되리.


2008. 1. 29

posted by 청라

똥을 묻으며

시/제3시집-춤바위 2008. 1. 28. 20:25
 

똥을 묻으며


똥을 덮는다.

낙엽을 긁어모아

내 삶의 부끄러움을 덮는다.


아무리 묻고 묻어도

지워지지 않는 냄새처럼

묻을수록 더욱 살아나는

지난 세월의 허물들


이순의 마을 가까이엔

담장을 낮추어야 한다.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한다.


무더기 큰 똥일수록

햇살 아래 드러내어

바삭바삭 말려주어야 한다.


posted by 청라

상대동

시/제3시집-춤바위 2008. 1. 23. 10:52
 

상대동



재개발  마을 상대동에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공회당 마당에서

참새들만 농성하고 있다.


서둘러 떠난

빈 집 화단에는

황매화, 수국 꽃나무

꽃망울들이 여물고 있다.


참새들은 알고 있지.

이 마을엔 봄이 오지 않는다는 걸


 

피멍 든 외침만 각혈처럼 떠올라

노을 진 하늘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posted by 청라

유리창을 닦으며

시/제3시집-춤바위 2007. 12. 22. 19:26
 

유리창을 닦으며


아파트 유리창을 닦는다.

골짜기마다 감추고 있는 보문산의 비밀이

가까이 다가온다.


산밑 낮으막한 등성이에서

불꽃을 피워 올려

산벚꽃 연분홍으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

온 산을 덮는 봄날의 환희와


비온 날 아침 떡시루를 찌듯

뭉게뭉게 일어나는 골안개로 온 몸을 가렸다가

한 줄기 햇살로 맨살 드러내어

진초록 함성 하늘 향해 이글거리는 여름날의 열정,


늦여름 초록의 밑둥에서 조금씩 배어나와

색색으로 물들였던 산의 간절한 이야기 떨어지고

나무 가지마다 침묵으로 앙상한

저 가을날의 고독


시루봉 이마 하얀 눈으로 덮이고

골짜기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옅어졌다가

어느새 수묵의 함초롬한 자세로 식어있는

겨울날의 허무


유리창을 닦는다.

집안 가득

보문산을 들여놓는다.



2007. 12, 23

 





posted by 청라

귀향

시/제3시집-춤바위 2007. 11. 13. 09:34
 

귀향


휘파람새 울음을 밟고

돌아가네.

저녁노을 깔린 고갯길 굽이돌아

골어스름 안개처럼 내리는 여울 건너

마실갔다 돌아오는 아이처럼 돌아가네.


집집마다 한 등씩 불이 켜지고,

땅거미 따라 내려오는

남가섭암 목탁소리.

산벚꽃 자지러진 향내를 묻히고

사바의 마을을 닦아주는 천수경 한 자락.


장다리골 너머

초승달은 떠오르네.

달빛아래 몸을 떨며 손 내미는

작아진 산들,


도회의 옷들은 한 겹씩 벗으려네

모든 것 다 벗고

빙어처럼 투명해 지려네.


실핏줄까지 드러나는

어릴 적 마음으로

고향의 품속으로 안겨들려네.


posted by 청라

파계(破戒)

시/제3시집-춤바위 2007. 11. 2. 07:36
 

파계(破戒)



암자(庵子)들은 도심(都心)으로 내려오고

부처님 말씀은 그냥 산에 남아있다.


목탁을 쳐봐야

자동차 소리에 가로막히고

불경(佛經)을 외워봐야

아무런 울림이 없다.


어제 밤 몰래 먹은 한 잔 술에 취해

아침 예불(禮佛)도 거른 저 스님아

얻은 것은 풍요(豊饒)를 얻었지만

잃은 것은 도(道)를 잃었구나.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