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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목숨
저 그늘 외로운 길
햇살 따라 가다 보면
수줍게 입을 벌린
진달래꽃 한 이파리
한겨울 딛고 일어선
여린 목숨 하나.
산 빛 아직 익지 않은
초 삼월 바람 속에
목청 돋워 봄 부르는
등대로 피었느냐
한 모금 물빛 향기로
세상 밝히는 목숨 하나.
글
기다림
막차는
휭 하니
바람만 뿌리고 지나간다.
가슴속에서 무너지는
섬광 하나
건너 뜸 개 짖는 소리
몸을 떠는 늦저녘 달
글
눈 내리는 마을
세상으로 나가는 문들은
닫혀 있었다.
흰 산도라지 꽃 몽롱한 산자락마다
마지막 푸른 목청이 덮이고,
강물은 더 깊은 울음으로 우는데
솔가지 부러지는 산울림 끝에 심지 하나 박고
촛불을 켠다.
살갗마다 일어서는 빛이랑, 외로움이
붉은 포도주 한 잔에 녹아나고,
산마을 밖 두고 온 그리움 눈 속에 묻으면서
참나무 울타리 잎새 떨며 우는 바람에
아우성치는 세간의 정들 먼지처럼 날리리라.
칭얼대며 유리창 두드리는
송이 눈에
어제 일들 깨끗이 털어버리고,
혼자 마시는 술잔 가득
아직도 남아 있는 얼굴 목구멍 속에 구겨 넣어도
잠깐 취기처럼 아득한 세사의 뿌리들이
덮어도 덮어도 지울 수 없는 댓잎으로
돋아나는데
아무도 넘어오지 않는 회재 고개 너머로
오늘 잠시 떼어놓은 이름표를 달고
내일은 또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글
산나리꽃
때로는
혼자일 때가
더 외롭지 않을 수도 있다.
닿을 수 없던 한 뼘만큼의 눈물
꽃술 속에 감춰두고
민들레 꽃씨처럼 그리움의
날개를 날려
한 송이 수줍은
산나리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바람이 밟고 가는 나뭇잎 소리에
가슴 설레며
사랑하는 마음
몰래 피었다가 몰래 떨어지는
산나리꽃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글
訟詩
솔처럼 사오시라
산처럼 커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러워
쉽게 노하지 않는 사람
한 시대를 밝히던 횃불을 끄고
四十年 넘게 걸어오신
빛나는 발자취 돌아보는 뒷모습에
은은한 난초향이 풍겨옵니다
님이여!
당신이 첫발을 딛으시던
민족의 새벽은 너무도 춥고 어두웠습니다.
황량한 역사의 들에
묘목을 심고
풍설 속에 지성으로 가꾸신 당신의 손이
삼천리 강산 곳곳마다
초록빛 광휘 찬란한 한낮을 빚으셨습니다.
잡을 수 없는 거리만큼
이제
물러나시는 당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는 당신,
솔처럼 늘 푸르게 사오시며
무사히 맺으시는 작은 福
꽃으로 피워
가시는 발걸음마다 큰 福으로 열리소서.
<權義石 校長先生님 停年 退任式에 붙여>
글
頌詩
학같이 살으소서
나무라 치면
하늘 향해 팔벌린
낙우송이라 할까.
둥치처럼 견고한
내면의 성 쌓으시고
초록빛 그늘 드리운
당신의 가슴은 늘 열려 있어서
목마른 새
날개 지친 새들이
따스한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몸짓의 껍질을 벗기고
열려진 가슴 사이로 속을 들여다 보면
안경 너머로 건너 오는 눈빛이
너무도 정다워서 고향 같은
당신은
민족의 새벽 등불 들고
빛을 세우던 사람.
한 올씩 나눠주던 당신의 빛으로
삼천리 방방곡곡 조금씩 밝혀지고
그 빛이 다시 빛을 일구어
우리는 이리도 환한
한낮을 맞았더니다.
당신이 가꾸시던 이 꽃밭은 거칠어
아직도 많은 손길이 필요하지만
풍설 온몸으로 막으며
사십년 넘어 외로이 걸어오신
외길
질기디 질긴 끈을 끊으오니
님이여!
학같이 살으소서
학같이 살으소서.
<金洛中 校長先生님 停年 退任에 붙여>
글
야간 자습
투명한 유리창은
아이들의 상승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수많은 목소리에 눌려
작아질대로 작아진 아이들의 소망은
가끔은 무지개빛 호랑나비가 되지만
초록빛 자유로운 바람으로
날아오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철조망은 날개를 찢어 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은 멎어 있었다
영산홍꽃 꽃가지마다
불을 지핀 오월이
산 접동새 소리로 아이들을 데리러 왔지만
유리창에 부딪쳐
힘없이 비가 되었다
어둠을 태우는 형광등
환한 불빛이
우리 아이들에겐 오히려
진한 어둠이었다
글
네잎 클로버 깃발처럼 내 가슴에 펄럭이는 날은
Ⅰ. 네잎 클로버를 따서
가슴에 꽂았다.
하루 내내 초록의 문을 열어 맞아들인
그 환한 보름 같은
주문을 안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 다방 그 자리에서
오늘도 너를 기다려야지
조금은 술에 취한 듯
흔들리는 도시를 안고
굳게 옭힌 매듭을 한 올 한 올 풀면서
네 얼굴 뒤에 숨은
또 하나의 얼굴을 보리라.
Ⅱ. 빌딩 숲 그늘에 눌려 살아서
응달 어린 싹처럼 노랗게 지나온 나날
산보다 더 높이 둥그렇게 달을 띄우고
오늘만은 절대로
허리 굽히고 살지 않으리
키작은 사람은
키작은 사람끼리 어깨동무 하고
마른 수숫대 모여 겨울을 버텨 내듯이
칡덩굴로 한데 얽혀 뻗어 가리라.
네 잎 클로버잎
내 가슴에 깃발처럼 펄럭이는 날은.
글
다듬이 소리
다듬이 소리 청량한 소리
하늘 끝에 하나 남은 별불을 끄고
어둠의 맨땅 위에
길게 누운 아이의 영혼은 들리는가
수목처럼 청청한 목소리로
무한의 바다에 돌을 던지는
엄마의 음성이 들리는가
결고운 細명주
한 올 한 올 다듬는 소리
입을 아이 없는 옷을 만드는
손끝에 바람 이는 마음을 아는가.
글
온실
아픈 마음으로
촛불을 끄지 말자
온실에 가면
가녀린 꽃잎들이 어깨동무로 팔 벌리고
굳게 겨울을 막아 서 있는 것을.
땅 밑으로 믿음의 수액을 교환하며
늘 훈훈한 마음을 지켜가는 것을
꽃들이 서로 정답게
가즈런한 햇살을 나누어 이고
풀무치 소리는 풀무치 소리대로
아무 그늘 밑에서나 반짝이게 하고…
입동 끝 회색 빛 하늘 아래
작은 새처럼 깃 부비며
혼자 떠는 사람아.
온실에 가면
눈부신 손들이 서로 도와 일으켜 세운
아침이 열리느니
아픈 마음으로
촛불을 끄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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